▲1923년 활동한 자경단자경단은 조선인 학살의 주역이었다.
니시자키 마사오 제공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를 비롯해 일본 전역에 생긴 자경단의 수는 1923년 10월 하순 기준으로 무려 3689개였다.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대규모 자경단이 결성되었을까. 이는 지역마다 이름을 조금씩 달리하지만 '보안조합'에서 유래를 찾아야 한다.
1918년 일본에서는 저 유명한 쌀 폭동이 일어났다. 그해 8월 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내각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섭 전쟁을 벌인다고 선언하자 쌀 도매상은 전쟁 특수를 노리고 매점 매석에 나섰다. 쌀값은 3~4배 이상 가파르게 치솟아 분노한 민중이 도야마(富山)의 작은 어촌을 시작으로 쌀 가게를 습격하고 불을 지르는 항거에 나섰다.
전국 300여 지역에서 수십만 민중이 참여했고 이를 탄압하느라 10만이 넘는 병력이 출동했을 정도다.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 일본의 치안 당국이 세운 방책이 바로 '국민 경찰' '민중의 경찰화'였다. 지역 유지를 매개로 민중을 경찰 주변으로 포섭해야 앞으로 일어날 노동운동, 농민운동, 민중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일본 전 지역에서 보안조합 혹은 안보조합이 지역 경찰의 독려 속에 만들어진다. 보안조합의 규약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경찰과 협력해 마을 내 안녕을 유지하고,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조합원은 "범인의 인상착의 및 행선지에 대해 즉각 보고하여 체포에 협력하고 증거품을 보존"하는 의무를 다해야 했다. 조합 창립식에 지역 경찰서장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축사를 했다.
대학살 직전인 1923년 4월 30일, 지바현의 아다치 경찰부장이 이 현의 소방조장회의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국의 조합원 수가 무려 18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찰 휘하에 강력한 민간 경찰, 언제든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동원될 수 있는 집단이 탄생한 것이다. 이것이 자경단 출생의 비밀이다. 순수한 상부상조나 마을 자치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이 보안조합이 순식간에 수천 개의 자경단으로 탈바꿈, 조선인 학살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자경단의 핵심은 동학농민군·
의병·
독립군 탄압했던 재향군인
그렇다면 자경단에는 어떤 사람이 참여했을까? 이는 자경단 결성의 유래와 함께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점이다. 청년단이나 소방단도 자경단의 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중핵은 '재향군인회'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개병제를 시행했으나 파쇼화된 1930년대 이전에는 주로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 군대로 끌려갔다. 이들이 경험했던 전선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1894년 동학농민군과 치른 싸움이 있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가 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에는 어느 병사의 진중일지가 소개된다. 1895년 1월 8~10일에 벌어진 장흥전투에서 "우리 부대가 서남 방면으로 추격해서 타살한 농민군이 48명, 부상한 생포자는 10명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생포자는 고문한 다음 불태워 죽였다"라고 쓰여있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얼마나 잔학하게 죽였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동학농민군을 짓밟은 일본은 1910년 한반도 강점에 맞서 일어난 의병운동 역시 도륙한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조선의 빨치산 부대와 수많은 전선이 형성되었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조선독립군과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를 즐겼던 군인이 고향에 돌아와 만든 조직이 재향군인회였다. 이는 자율조직이 아니라 일본 육군의 일부여서 규율도 엄격했다고 한다. 이런 재향군인회가 자경단을 어떻게 끌고 갔을지는 눈을 감고도 짐작할 만하다.
재향군인회는 정신무장까지 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과 '조선은 아시아의 작은 야만국'이라는 후쿠다 유키치의 '멸시론'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그 첫걸음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침탈을 꼽았다. 멀리 보되 작은 것부터 도모하자며 내세운 방안이었다.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가 한반도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주역이 되었으니 요시다의 침략주의는 1854년 <유수록>으로 세상에 나온 지 불과 반세기도 안돼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자경단은 요시다 쇼인과 이토로 이어지는 침략주의에 환호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리를 되새기며 홋카이도, 대만, 조선에 이어 더 많은 식민지 침탈을 꿈꾸었을 터이다.
자경단의 '침략주의'와 '조선인에 대한 적대관'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은 고쿠류 가이(黑龍會)와 고쿠스 이카이(國粹會)였다. 고쿠류 가이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주도하여 창립한 극우단체로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 적잖은 낭인이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 관동군의 밀정 노릇을 했는데 우리 독립군을 대상으로 정탐, 이간질, 암살 작전 등을 수행했다. 간토대지진 당시는 일본도를 들고 조선인 학살에 앞장서 자경단의 폭력을 부추겼다.
자경단은 이렇듯 준군사조직이며 조선인은 죽여도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집단,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지면 조선인 살인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무리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의 묵인이나 지시없이 살인에 나설 수 있었을까? 이들에겐 면허가 필요했다. 면허만이 아니라 살육을 부추기고 지시한 장본인이 바로 히로히토 일왕과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이다.
일왕과 총리, 살육 허가하고 부추긴 장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