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벽파진전첩비1956년 진도군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었다.
김재근
첫 여정(旅程)은 벽파진(碧波津)이었다.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항구다. 진도와 육지를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울돌목이지만, 물살이 거칠어 배를 띄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을 오가는 배는 벽파항이 최상이었다. 목포와 완도‧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였으며, 제주 사람들이 미역과 귤을, 쌀과 소금으로 바꾸어 간 곳도 이곳이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조선 모든 수군 이끈 채 배 12척이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명량해전 최후의 전술을 고민했다. 뒤로 높지 않은 바위 언덕에 정자 하나가 풍경처럼 서있다. 벽파정(碧波亭)이다. 1207년(고려 희종3) 처음 세워졌다. 2016년에 다시 지었다.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들어온, 제주도로 건너가는 이들의 사연과 시구가 서리맞은 감나무에 홍시처럼 주렁주렁 걸려있다.
정자 위쪽 정상에서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가 웅장하게 바다를 내려다본다. 눈맛이 시원하다. 해무가 낮게 깔린 바다가 한 폭의 수묵화 같기도 하다. 전첩비는 1956년 진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바위 언덕 정상을 깎아 만든 거북좌대가 볼만하다. 동양 최대 높이란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순절자들을 기록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소전은 진도 출신이고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소전은 '소전체'로 일가를 이룬 당대의 명필이었다. 서화 수집가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도 높았다. 무엇보다 추사의 '찐팬'이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 치카시도 추사에게 진심이었다. '세한도(歲寒圖)'는 말할 것도 없고 편지까지도 열심히 수집했다.
추사가 조선의 명필에서 동양의 명필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그의 공이다. 태평양전쟁 중임에도 일본까지 온 소전의 정성에 감복하여,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양보했다. 얼마 후 후지쓰카의 연구실이 공습을 받아 불탔다. 아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부친이 소장하고 연구했던 1만여 점에 이르는 추사 자료 전부를 과천문화원에 기증했다. 추사기념관인 과지초당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소전은 국회의원을 지내며, 정치자금을 마련하느라 집념으로 가져온 세한도를 저당 잡혔단다. 끝내 돈을 갚지 못해 품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심정이 어떠했을까.
붓글씨를 서도(書道)에서 서예(書藝)로 끌어 올렸다고도, 추사 이래 최고라고도 평가받는 소전이다. 읍에 소전미술관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인, 전첩비 앞에서 생각이 많았다. 글씨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