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글을 쓰는 내 옆을 늘 든든히 지켜주고 있는 책장
김나라
그는 훌륭한 배치라고 감탄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그가 내 방에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이 서재 덕분에 한층 안정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서로의 책을 합친 지 4년 후, 그는 자신의 책을 끈에 묶어 이사를 나갔다. 책장은 완전히 내 책으로 가득 찼다. "한 권 사면 한 권 버려야 해!" 말해주던 그가 없어서, 책장 크기를 최대한 늘리고도 다른 책 위에 누워 쌓이는 책기둥이 여럿 생겼다.
내가 모르는 그의 전 애인에게서 그에게로, 다시 나에게로 와 남겨진 책장. 나는 책장을 보면서 생각한다. 네 운명도 참 재밌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다시는 누구와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또 같은 일을 겪지 않아서. 남겨지는 쪽이 내가 되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다행한 일이다.
적어도 책장은 잃어버리거나 부서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글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보내고, 그런 내 옆에 책장은 자기 모습 그대로 서 있다. 그게 흔들림 없는 응원처럼 느껴지는 것도 습관적 의미 부여이리라.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해 주던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물건이 있다는 건,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째보력'은 이따금 이별에 기특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뒷모습과 책장... 사랑의 효용이 뭘까
서로 사랑하던 어느 날에 나는 그와 밖에서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는 버스를 기다릴 것이었고 그는 먼저 집으로 갈 것이었다. 정류장에서 문득 돌아봤을 때 그는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그 뒷모습이 그대로 사라져 다시는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아득하고 망연했다. 나는 한참을 달려서 그를 붙들었다. 보고 싶어. 그를 보면서 말했다. 그는 정말로 행복하게 웃었는데,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렸다.
헤어진 뒤 그가 이 집에서 나갈 때, 나는 이사를 도왔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 짐을 들고 새 집으로 혼자 향할 때, 집 앞 언덕 위에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표정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도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딱 한 번, 사람 없는 길에서 그를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반갑게 웃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다. 어물 어물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두고 그는 먼저 걸어갔다. 나는 지켜보고 있었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눈에 새길 수 있었던 그날의 마주침이 나는 감사했다. 그때 본 뒷모습은 흔들림 없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책장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흔들림 없는 각진 어깨를 닮았다. 헤어진 채로 같이 사는 동안에도 한결 같았던 그의 응원을 닮았다. 뒷모습을 지켜보는 건 나지만 뒷모습이 나를 지켜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