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의 2015년 작품 <우리들>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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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학 온 지아라는 존재가 자신의 1등을 단숨에 빼앗아가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차갑게 외면해버린다. 아이들이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어리기 때문에 악마처럼 악랄하고 잔혹한 데가 있는데 그 면모를 보라라는 인물이 잘 보여준다. 나는 그 보라의 모습에서 수 년전 단짝이었던 한 아이가 겹쳐보였다.
중학교 첫 입학식날, 헐렁한 교복을 입고 삭막한 중학교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던 내게, 초등학교 6학년 내내 단짝이었던 그 아이가 내게 와서 "우리 같은 반이야"라고 밝게 외치던 순간. 삭막해보이던 중학교 건물이 단숨에 핑크빛으로 물든 느낌이었다. 1년 내내 단짝으로 지내며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던 우리였기에 같은 반이라는 소식은 별다른 의심없이 그 기간이 연장된다는 말과 같았다.
그 아이 덕분에 다른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아도 된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되었고, 우리는 늘 그랬듯 점심시간,쉬는시간,체육시간 그리고 하교시간에도 늘 함께하며 서로의 모든 일상을 공유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첫 중간고사 결과 발표날이었다. 평소 공부를 나보다 잘하던 그 아이는 며칠 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선생님의 입에서 전교 1등의 주인공으로 내 이름이 불리던 순간. 그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 때 나를 향하던 그 싸늘하고 따가운 시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 나는 하루 중 가장 달콤하던 점심시간이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으로 바뀌었다. 한 번은 책상 안에서 교과서를 꺼내다 바닥으로 종이가 하나 툭 떨어진 적이 있었다. 연습장 위에 빨간 글씨로 적힌, 아직까지 내 마음 속 깊이 날카로이 각인된 빨한 문장. "너는 일주일 안에 죽~~".
자주 주고 받던 편지를 통해 너무도 익숙해진 작고 동글하던 글씨체. 그 아이의 짓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왜 그랬냐고 따져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내가 더 비참해질 것 같아 종이를 구겨 조용히 쓰레기통에 넣으며 혼자서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손에 컵 떡볶이를 들고 늘 함께였던 하교길을 빈 손으로 혼자 터덜 터덜 걸으며 내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외모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엄마가 피아노 선생님이라 늘 주목을 받던 반짝이던 그 아이. 같은 반에 아는 친구가 없어 쉬는 시간에 혼자 책을 보던 내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주던 그 날.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 이후 우리는 비밀일기장을 만들어 서로가 좋아하는 사람, 부모님에게는 말하지 못한 비밀들을 공유하며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삼남매 중 첫째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따듯한 위로도 잘 해주던 그 아이. 맑은 수채화같던 초등학교 시절 그 아이와의 추억은 내가 전교 1등을 한 이후, 검은 잉크가 떨어져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그 아이는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아물지 않을 빨간 생채기를 남기고 홀연히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나중에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피아노 학원을 하던 엄마의 사업이 잘 안되어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서 다른 곳으로 쫒기듯 이사를 갔다고 했다. 영화 속 보라를 보며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가 그 아이를 깊이 깊이 미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