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담도가 속한 아산만 유역을 표기한 여지도(국토지리정보원 고 4709-78-여지도 아국총도). 지도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행담도 주변을 홍주(홍성)-면주(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지름길)로 쓰고, 대동지지(1864년)에 행담도를 '수원 첩로'(水原捷路, 수원 가는 지름길)라고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이보다 300여 년 앞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행담도 앞바다에 서 있는 영웅 바위와 함께 '첩로'(지름길)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운데에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영웅암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00척가량 된다. 만조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홍성)-면주(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지름길)다.
행담도 앞바다가 서울 경기를 잇는 주 교통로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고 해상 중심 시대 주 항로였음을 말해준다. 실제 행담도가 속한 아산만 일대는 삼국시대 때부터 군사적 요충지이자 문화 유입지였다. 서역으로 가는 주 항로로 교류의 중심 해역이었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아산만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충돌했다. 특히 무령왕(백제 25대 왕) 때는 백제의 전진기지이자 문화 유입지로 발전했다. 고려 때는 몽골군과 왜구가, 조선 때는 왜구의 침범이 빈번했다.
<세종실록지리지>(149권)에는 서산 해미로 충청병마도절제사가 옮겨오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충남 서해안 일곱 곳 주둔했는데 이중 대진만호(大津萬戶)는 신평현 대진(大津)에 병선 13척과 함께 선군 794명이 있었다. 향토학자들은 대진(한진)만호 가 있던 곳을 영웅바위 인근인 송악읍 오곡리 전대리 주변으로 보고 있다.
고종 3년(1868) 때는 미국이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내세워 남연군묘(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의 할아버지)를 도굴하기 위해 행담도에 정박했다. 당시 급박했던 상황이 '고종실록'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달 18일 오시, 세 돛 짜리 이양선 1척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홍주 행담도에 정박했습니다. 종선 1척은 돛이 없이도 다닐뿐더러 배 안에서는 연기가 나면서 빠르기가 번개 같았습니다. 얼마 후 본 군이 구만포에 도착해 육지에 내렸습니다. (중략) 러시아 군대라고 하는 병졸 100여 명이 군복을 입고 창, 칼, 총 등을 가지고 곧바로 관청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를 빼앗고 관청 건물을 파괴하였습니다. - 고종실록 5권
20일 진시에는 곧바로 홍주 행담도로 가서 큰 배와 함께 정박하였으며 썰물 때에는 수원 영웅암의 바다 밖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고... - 고종실록 5권
남연군 묘 도굴 사건은 미국이 남연군의 유골을 미끼로 조선 정부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도굴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는 서양인을 배척하려는 분위기가 더 커졌다. 흥선대원군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처럼 행담도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응 역사 속 한복판에 서 있었다.
"왜군들은 달빛에 비친 바위를 조선 군사로 보고...", 영웅바위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