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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도 걱정했던 행담도 주민...그곳에 언제부터 누가 살았나

[그섬에 사람이 살았네③] 1945년 거주 가주 4가구,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 급증

등록 2024.09.25 10:02수정 2024.09.2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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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 행담도 하면 주로 떠올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0년까지 이 섬에 사람이 살았다. 우리 역사도 담겨 있다. 개발에 밀려 끊어진 행담도 사람들이 역사와 이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당진시에서 최근 펴낸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주로 참고하고, 추가 취재한 내용을 보탰다.[편집자말]
 행담도에서 거주했던 한 원주민의 집. 1970년대 초반 경이다.
행담도에서 거주했던 한 원주민의 집. 1970년대 초반 경이다.당진시

"몰래 침입해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빼앗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은 (중략)...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횡포에 이은 프러시아 수군 제독 명의의 협상 요구에 조선 정부의 대응은 이처럼 강경하고 단호했다.

1868년 4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행담도(행담섬)에 정박한 후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했다. 도굴에 실패하자 도주하면서 인근 포구 민가에 침입해 횡포를 부리고 약탈했다. '고종실록(5권)'에는 당시 상황을 시시각각 자세히 전하고 있다.


"관청으로 들이닥치더니 무기를 빼앗고 관청 건물을 파괴했습니다..."
"저놈들 10여 명이 밤을 타서 구만포에 있는 외딴마을에 난입하고 집물을 강탈하여 갔는데..."

 행담도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갯벌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다. 1970대 후반 추정.
행담도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갯벌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다. 1970대 후반 추정.당진시

오페르트의 본선이 행담도에 배를 정박했는데 보고문 어디에도 행담도 주민들에 대한 피해 언급은 없다. 이로 미루어 당시 행담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1959년 당시 당진군의 지명 조사철에 행담도 주민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행담: 약 4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후로 부락이 되었다고 함.

1959년을 기준으로 40년 전이면 1920년대다.

  1959년 당시 당진군의 지명 조사철에 행담도 마을의 유래에 대해 '약 4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후로 부락이 되었다고 함'이라고 기재했다.
1959년 당시 당진군의 지명 조사철에 행담도 마을의 유래에 대해 '약 4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후로 부락이 되었다고 함'이라고 기재했다. 당진시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이 1934년과 1935년 여름(7월) '가치내(아래 행담도)'를 홀로 방문한다. 그가 1935년 7월 남긴 수필 <칠월의 바다>에는 행담도 주민의 삶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는 1934년 첫 방문 때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간다. 이어 '열 길이니 까마아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게딱지 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한다.


그 집에서 사는 노파에게 '여기서 혼자 사우?'라고 묻자, 아들과 손주하고 살고 아들은 준치를 잡으러 나갔노라고 대답한다. 심훈 또한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걱정하면서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라고 묻는다. 이에 노파는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라고 답한다.

 1980년대 중반 경 행담도에 거주하던 이익주 씨(63)의 가족 행사 후 찍은 기념사진 . 사진속에 등장하는 사람만 모두 45명이다.
1980년대 중반 경 행담도에 거주하던 이익주 씨(63)의 가족 행사 후 찍은 기념사진 . 사진속에 등장하는 사람만 모두 45명이다.당진시

 행담도분교 중앙현관 앞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기념쵤영을 하고 있다. (1981년 10월) 서진 속 등장하는 사람등은 모두 52명이다.
행담도분교 중앙현관 앞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기념쵤영을 하고 있다. (1981년 10월) 서진 속 등장하는 사람등은 모두 52명이다.당진시

원래 행담도가 고향이 아니라는 것과 농사 지을 땅을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생계를 위해 이곳으로 흘러들었음을 말해준다. 즉 당시 사람들에게도 행담도는 배가 아니면 갈 수 없어 교통이 불편하고,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으로 인식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인근 주민들이 행담도에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면서 '가치내(갇히네)'라고 부른 연유가 잘 드러난다.


이로 미뤄보면 당시 행담도에 살던 사람들은 심훈이 만난 노파와 노파의 아들, 며느리, 손자 등 4명이 전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1920년 말이나 1930년대 초 행담도에 거주한 것으로 짐작된다. 행담도 첫 주민들인 셈이다.

원주민들은 심훈이 행담도에서 만난 사람들을 김진영씨(현재 행담도 인근 맷돌포구 거주) 집안으로 보고 있다. 주민들은 1960년 초 당시를 기준으로 할아버지부터 3대가 거주한 곳은 김진영씨 집안이 유일하다고 말하고 있다. 김진영씨는 김해김씨이고 어머니 김순례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실제 김진영씨의 집 앞에는 수령이 오래된 백양나무를 닮은 미루나무 고목이 있었다고 한다.

 행담분교 아이들과소풍을 간 행담도 학무모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다. 1980년 대 중빈
행담분교 아이들과소풍을 간 행담도 학무모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다. 1980년 대 중빈당진시

증언에 따르면 해방되던 1945년 행담도 거주 가구는 4가구였다.

"1945년 봄 행담섬에 (거주하는 사람은) 4가구에 불과했습니다." - 이경철 옹 증언, 한국국토정보공사(대한지적공사) 전신인 조선지적협회 예산출장소에서 근무. 출처, 신평면지 2017

심훈이 1934년 만난 가족들이 세대를 이뤄 정착한 것일 수도 있고, 생계를 위해 외지에서 다른 세대가 좀 더 유입됐을 수도 있다.

행담도에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1950년 6.25 전쟁을 거치면서다. 주로 경기, 인천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대거 들어왔다. 행담도뿐만이 아니었다. 피난민들은 인근 신평면 매산리, 신평면 신흥리, 합덕읍 소소리, 우강면 송산리, 송산면 당산리 오도 등에 정착촌을 형성했다. 이중 일부는 전쟁 후에도 행담도에, 당진에 정착했다. 당시 행담도에 착한 피난민들은 4가구였다. 전쟁 직전 5가구였던 행담도는 9가구로 늘어났다.

"16살 때 6.25가 터져 경기도 양주에서 당진으로 피난 왔어. 신금곡리로 왔는데 거기서 몇 달을 살다 남편을 만나 열일곱살에 결혼했어. 결혼해서 얼마 안 있다가 먹고 살기 어려워서 행담도로 건너갔어." - 임은순(90), 경기도 양주 출생. 6.25가 나던 16살 때 당진으로 피난했다가 17살 결혼 후 1990년대 말까지 행담도 거주

 1987년 당진 상록회 회원들이 행담도를 방문하자 행담도 마을 주민들이 포구 앞까지 나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은 행담포구 모습이다.
1987년 당진 상록회 회원들이 행담도를 방문하자 행담도 마을 주민들이 포구 앞까지 나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은 행담포구 모습이다.당진시

"행담도에서 태어났지. 7살 때 6.25가 났는데 피난민들이 배 타고 많이 내려왔어. 배 타던 사람들이라 전쟁 끝나고도 행담도에 눌러앉았어. 전쟁나기 전에는 다섯 집이었는데 이게 아홉 집이 됐지." - 이은주(78), 195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행담도 거주

<신평면지>에 따르면 1951년 1.·4 후퇴 때 38선 이북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남한으로 대거 피난했다. 행담도가 속한 신평면은 황해도 해안 주민들이 선박을 이용해 아산만을 거쳐 매산리 깔판, 부수리 맷돌포, 운정리 공포리에 집단으로 피난민이 몰렸다.

정부는 매산리 깔판과 신흥1리에 정착촌을 마련해줬다. 당시 피난민은 행담도 인근인 매산리에 15세대, 맷돌포에 13세대, 운정리 공포리에 10세대, 신흥1리에 50여 세대가 살았는데 주로 어업에 종사한 것으로 돼 있다.
#행담도 #가치내 #주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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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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