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손님을 맞이하는 편의점(기사 내용과 무관함)
김아영
아무리 명절의 의미가 빛바랬다고 해도 명절에 일하는 건 평소와 기분이 달랐다. 3대가 같이 편의점에 들어와 손주의 간식거리를 같이 고르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내 신세가 서글퍼졌다.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고른 건 평소 내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했던 장난감. 할머니 되시는 분은 고민 없이 그걸 계산했고 아이는 장난감을 받아들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가족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평생 혼자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라고 큰소리 떵떵 치던 나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쓸쓸한 기운이 서렸다.
애써 담담하게 근무를 서는데 물류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명절을 대비해서 잔뜩 발주를 넣은 점장님이 원망스럽지만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누굴 탓하랴. 물류 기사님이 위로한다고 건넨 "명절인데 고생이 많네" 한 마디에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혼자 있을 땐 침울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사서 고생하는 건 아닐까. 왜 일 년에 딱 두 번 있는 명절도 제대로 못 쉬는 걸까. 성실히 일하면 형편이 나아지긴 할까.'
단골손님들도 날 발견하고 놀라움과 반가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추석인데 어디 안 갔어? 부모님 안 보러 가?"
"네, 집이야 아무 때나 가면 되죠."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면서도 어딘가 들뜬 분위기를 풍기는 손님들의 얼굴을 몰래 부러운 눈길로 훔쳐보았다. 아무리 명절이란 걸 인식하지 않고 덤덤하게 일하려고 해도 그날따라 유난히 시간이 더디게 가고 매 순간 피로가 배로 쌓이는 듯 했다. 나에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이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뒤집어야 맞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가 평소만 같으면 했다.
자정이 지나니 슬슬 취객 손님이 많아졌다. 얼굴이 불콰한 손님들은 대부분 목청이 컸고 행동에 조심성이 없었다.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대화는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제법 경력이 쌓였을 때라 나름 대응 방법을 터득한 후였다.
밑도 끝도 없이 신세 한탄을 하는 분은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아, 네" 하고 대답한 뒤 바쁜 척하면 그만이었고, 반말에 삿대질을 하며 대뜸 고함을 치는 분은 '이 사람이 하는 말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그냥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하며 손님이 제풀에 지쳐 나갈 때까지 버텼다. 아가씨 운운하며 농담조로 성희롱을 하는 손님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똑바로 쳐다보면 대부분 무안해 하며 입을 다물었다.
새벽 세 시쯤 되었을까. 잠시 손님이 뜸해져서 한숨 돌릴 겸 휴대전화로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자 방심한 죄를 묻겠다는 듯 느닷없이 두 남자가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편의점 안으로 들이닥치는 게 아닌가.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밀어붙이며 엎치락뒤치락 편의점 안에서 난투극을 펼쳤다.
아무 조짐도 없이 난데없이 펼쳐진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두 남자는 매장을 한 바퀴 돌며 매대에 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상대방에게 집어던졌다. 그러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계산대 위로 때려눕혔고 밑에 깔린 남자가 버둥거리는 힘 때문에 포스기가 밀려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체중을 실어 포스기를 지켰고 두 남자의 주먹다짐은 더 격해지면서 계산대 앞 매대를 쓰러뜨렸다.
한쪽이 밀리는가 싶던 싸움은 밀리던 쪽의 반격으로 다시 격렬해졌다.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경찰에 신고를 한 다음 점장님에게 연락을 드렸다. 점장님은 위험하니 창고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셨다.
팍! 쨍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