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도소 정문 앞에서 출소 소감을 밝히는 김남주 시인
출처 불명
그의 시는 노래가 됐고, 사람들은 노래가 된 시를 함께 부르며 결기를 다졌다. '들불과 반란과 죽창이 되자'고 선동하는 시(<노래>)는 사람들에게 전의를 불어넣었고,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라면 서로 일으켜주며 함께 가자'고 격려하는 시(<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는 사람들에게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비유하지 않아도, 부러 장식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해낼 수 있다면 나도 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내 그의 시에서 그만이 해낼 수 있고 나는 혹은 우리는 아직은 해낼 수 없는 명백한 근거를 발견한다.
시를 써보겠다는 생각은 아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네 벽에 가득 찬 것은 어둠뿐인 이곳에서는
(...)
시가 무슨 신성한 것이어서가 아닙니다
펜이 없고 종이가 없고 형편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흙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없기 때문입니다
밝음을 위한 무기 싸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한 줄의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가뭄을 이기는 저 농부들의 두레에 내가 낄 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내가 있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사고하고
그들과 더불어 내가 싸울 때
그때 나는 한 줄의 시가 됩니다
(김남주, <편지 1> 중에서)
펜을 들었다고 해서, 종이가 있다고 해서, 형편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흙이 있어야, 노동이 있어야, 흙과 노동이 빚어낸 생활의 얼굴이 있어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사고하고 싸울 때라야 한 줄의 시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문장을 얼마나 멋지게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구성을 얼마나 감동적으로 해내느냐가 아니라, '현장'과 '삶'이 얼마나 풍부하게 있느냐가 글의 밀도와 온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는 아직은 그런 글을 써낼 수 없는 것이다. '남민전 전사'로써 온 삶을 투쟁과 혁명에 바친 김남주 시인과 같은 뜨거움을 가져본 적 없으니까. 현장에 발 딛고 거기서부터 글을 끌어올리지 않고, 공중에 머물며 관망하듯 글을 던졌으니까. 내가 정의당 공보담당자로서 쓰는 글의 힘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당의 활동과 열정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간명한 사실을 이제는 안다.
늘 불꽃처럼 타오르던 김남주 시인의 언어에 비관이 깃들기 시작한 건 출소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되찾은 때부터였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자유의 시대이기도 하다. 몸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모두 얻은 셈이지만 도리어 그는 좌절에 빠진다. 췌장암을 선고받기 직전 쓴 시(<근황>)에서는 아예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이 거리에서 나는 아무짝에도 쓰잘 데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최영미 시인은 김남주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고, 배가 터지도록 부어오른 / 휘황한 거리에서 할 일이 없었던 어제의 전사 / 당신의 시가 피와 칼만이 아니라 나뭇잎에 부서지는 / 햇살과 풀잎에 연 이슬을 노래할 즈음, 당신은 갔습니다.
(최영미, <김남주를 묻으며> 중에서)
밤이 대낮처럼 발가벗고 거리는 배가 터지도록 부어올랐으니 직관과 직설로 쓴 시의 시대는 끝났는가. 그럴 리 없다. 김남주 시인이 쟁취하고 싶었던 시대는 이미 도착했을지 몰라도, 또 다른 시인들이 쟁취하고 싶었던 시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시인들의 이름은 노동자다. 여성이다. 성소수자다. 장애인이다. 이주민이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가장 김남주 같은 시를 쓰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김진숙씨다.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뒤 37년을 투쟁해 2022년 복직하고 정년퇴직을 이룬 노동자. 며칠 전 공개된 밴드 '단편선 순간들'의 노래 '음악만세'를 듣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강렬한 연주로 구성된 5분 25초짜리 노래의 한중간에 1분 정도 김진숙씨의 퇴직 연설이 삽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