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와 함께한 어린 시절의 추억

'스뎅 다라이'가 넘치도록 잡채를 만들었던 엄마가 생각나네요

등록 2024.09.14 15:15수정 2024.09.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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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현관문을 열면 참기름 냄새가 솔솔 코 끝을 파고드는 날이 있었다. 그럼 바로 알았다. '아, 곧 있으면 추석이구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엄마는 어김없이 잡채를 만들었다. 피망, 버섯, 당근, 시금치, 색색의 야채와 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엄마표 잡채'는 언제나 푸짐하고 꿀맛이었다.


평소 자주 찾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잡채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은근 좋았다. 잘 느끼지 못했을 뿐 나는 은근 잡채러버였나 보다. 손이 큰 엄마는 평상시에도 커다란 '스뎅 다라이'가 넘칠 만큼 그득그득 잡채를 만들었다.

'어휴, 저 많은 걸 다 누가 먹어. 누가 보면 식구가 열은 되는지 알겠네.'

어린 나까지 걱정될 만큼 우리 가족이 다 먹기에 너무 많은 양의 잡채가 엄마 앞에 놓여 있었다. 물론 엄마는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렇다. 엄마에겐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잡채(자료 사진)
잡채(자료 사진)goodeats_yqr on Unsplash

우리 몫을 제외한 나머지 잡채들은 필시 이모들에게 돌아갈 터였다. 사실, 우리 집은 나눔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집이다. 부모님은 집안에 먹을 게 생기기가 무섭게 주변 이웃들, 가까운 친척들과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다.

어릴 때 잠깐 교회를 다닌 적이 있었다. 주일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교회 승합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빠는 꽤 자주 교회 차량에 귤이나 초코파이 같은 과자를 두세 박스씩 실어 보냈다.


소풍날이면 엄마는 김밥을 세 통은 싸주셨다. 간식도 넉넉히 넣어 주었다.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으라며. 좋은 음식은 주변 이웃들과 나누는 부모님을 보며 자란 나는 자연스럽게 '음식이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성장하게 되었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우리는 독립을 했고, 엄마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잡채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 아쉽진 않았다. 잡채가 없어도 세상에 먹을 것은 차고 넘쳤으니까. 잊고 있던 잡채를 우연히 기억 속에서 다시 끄집어 내게 된 건 집밥 예찬론자인 강효진 작가의 요리 에세이 <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 덕분이다. 아주 유쾌하고 재미진 글 속에 침샘을 자극하는 맛깔스러운 요리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책을 읽고 지난번에는 김밥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유독 잡채가 눈에 들어왔다.


작가가 무려 세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다는 잡채. '과연 어떤 맛일까?' 너무 궁금했다. 유난히 책 속의 레시피를 꼼꼼히 읽어보게 되었다. 그동안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다행히 책에 요리 레시피가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정도쯤은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괜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일단, 잡채 만들기에 문외한인 나는 좀 더 디테일한 정보를 얻기 위해 유튜브와 블로그를 요리조리 살피며 조리법을 숙지했다. 재료는 당근과 양파, 표고버섯을 구입했다. 당면은 미리 사두었던 것을 쓰기로 했다. 사실, 고기도 구입하고 싶었으나 망치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하니 최대한 요즘 트렌드(?)에 맞게 비건을 지향하기로 했다.

먼저, 당면을 불렸다. 다음으로 잡채에 들어갈 야채들을 먹기 좋게 채 썰고 달군 팬에 달달 볶았다. 불린 당면은 끓는 물에 6분 정도 삶아낸 후, 다시 간장, 설탕, 물을 비율에 맞게 넣고 국물이 없어질 때까지 강불에 졸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재료를 한데 모아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주면 끝.

"우와! 내가 잡채를 만들다니!"

유리 볼을 가득 채운 잡채를 보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웅장해졌다. 풉. 드디어, 맛보는 일만 남았다. '혜란표 잡채 맛은 과연 어떨까?'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탱글탱글한 면발을 야채와 함께 야무지게 집어 입에 쏘옥 넣었다.

"꿀꺽."

'와, 이거 기대 이상인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의 단촐한 첫 잡채는 너무너무 맛있었다. 야채만 넣어서 그럴까. 오히려 더 담백하고 깔끔했다. 남편도 성공이라며 두 그릇을 비웠고, 나 역시도 배가 터질 때까지 잡채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러고도 잡채는 유리 볼이 반이나 찰만큼 남아있었다.

"여보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잡채가 이렇게나 많이 남았어!"
"다음번에 친구들 오면 꼭 만들어 먹자."
"나눠 먹기에 양도 넉넉하고 너무 맛있는 것 같아!"

남은 잡채를 보고 나는 또 오래된 습관처럼 친구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났다. 이 맛있는 걸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을 생각에. 불현듯 '스뎅 다라이'가 넘치도록 잡채를 만들어놓고 흐믓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엄마의 모습이 스쳤다. 괜히 빙그레 웃음이 났다. 역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푸짐한 잡채는 꼭 나눠먹기 좋아하는 우리집 식구들의 인정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음식만 보면 꼭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모님이 없었더라면, 나는 함께 나눠먹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자랐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음식을 나눠먹으며 쌓이는 정이 절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다는 건' 그 행위를 통해 삶을 나눈다는 의미다. 서로의 속내도 털어놓고 힘든 일, 기쁜 일도 공유하게 된다. 함께 먹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우정은 더욱 끈끈해진다.

실제로 심리학에 오찬효과(Luncheon effect)라는 것이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섭취하는 포도당, 단백질 등 영양소의 자극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이 생기고 긍정적인 반응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음식은 인간관계를 단단히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 간의 유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 또한 좋은 사람들과 밥을 핑계 삼아 진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요즘도 란스토랑(내 이름을 따서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집을 레스토랑이라 부른다)은 집밥을 사랑하는 친구들로 성황리에 운영 중이다. 물론 지인들을 대접하는 것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누구보다 함께 나눠 먹는 기쁨을 잘 알기에 오늘도 나는 대문을 활짝 열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집밥을 준비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잡채 #명절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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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고 꿈꾸며 독서하는 삶을 살고싶은 모카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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