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 섬진강 옆 성미산(성미산성)
이완우
임실 관촌면 섬진강변에서 성미산을 보았다. 이 산의 오른쪽 끝에 완주광양고속도로가 지나고 고속도로 위로 멀리 임실읍의 북쪽을 지키고 있는 용요산과 운수봉이 보인다. 성미산(430.5m)에는 백제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성미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무왕 6년(605) 2월에 각산성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각산성'을 성미산성의 옛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의 무왕이 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대립하며 성미산성을 쌓았고, 신라의 태종 무열왕은 군대를 이끌고 섬진강을 따라 이 지역을 통과하여 부안의 주류성을 공격하였고, 후퇴하는 길에 성미산성에 주둔한 백제 부흥군과 전투한 역사적 장소이다.
이 성미산성에서 백제시대 오부명(五部名) 인장와(印章瓦·도장 찍은 기와)가 2007년에 발굴되어 이곳이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이며 행정적 거점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성미산성이 임실 지역 최초의 중심지로서 잉힐(임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지도서(1759년)와 임실의 오래된 읍지에서는 방동(芳洞, 성미산에서 섬진강을 건너 있는 마을, 성미산 북쪽 2km 위치)을 옛날 치소(治所)로 기록하고 있다.
이 방동 마을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임실군(현)의 치소가 있었던 천년 마을이었다. 이 마을 앞에는 '천년 고을' 표지석이 서 있어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방동 마을에는 섬진강 유역에 농경지를 개척한 황장군 설화와 장제무림 설화가 전승되며, 가까운 곳 섬진강과 절벽의 절경에 사선대 설화가 전승된다. 임실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이 지역에 터전을 두고 있다.
지명 임실(任實)을 '임이 사는 고을, 열매가 충실한 고을'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백제 시대의 우리말 지명을 음차한 잉힐(仍肹)을 다시 다른 한자로 옮겨놓은 임실(任實)의 뜻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잉힐(仍肹)을 '앞 골짜기, 앞 고을'의 의미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백제가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는 호남정맥 넘어 섬진강의 앞에 있는 성미산성(각산성)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고려 가요 동동의 서사에서 '님(앞, 변이음 림, 잉, 임, 님), 곰(뒤)'의 활용을 확인할 수 있다.
德덕으란 곰ᄇᆡ예 받ᄌᆞᆸ고 / 福복으란 림ᄇᆡ예 받ᄌᆞᆸ고
德덕이여 福복이라 호ᄂᆞᆯ / 나ᅀᆞ라 오소ᅌᅵ다
아으 動동動동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