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장사없다. 하물며 글쓰기는...
최은경
귀한 자극을 한아름 안고서 완충된 마음으로 다시 글 메모장을 연다. 역시나 안 써진다. 단 한 자도 안 써진다. 생각이 바짝 말라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진 기분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타들어 가는 목을 적셔줄 오아시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로 아무 생각도 안난다고? 관찰의 대상이 발견되거나 소재가 떠오르면 뇌의 시동이 걸려야 하는데, 동공부터 풀리는 나른한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에세이를 연재한 지 1년 9개월, 그동안 쌓인 스무 편의 글들, 당월 마감을 목전에 두고 생각은 멈춰버렸다.
급기야 팬심 가득한 지인(아나운서이자 신지혜의 영화음악 DJ, 신지혜님)에게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저, 글이 안 써져요...!" 이런 지 꽤 여러 날이 되었다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자, 미소 지으며 일러준 뜻밖의 진단은 "더워서 그래요."
본인 역시 칼럼을 한 달에 네 편 정도는 거뜬히 쓸 정도로 글쓰기를 즐기며, 집필 중인 새 책도 11월까지 마무리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절반 정도의 페이지만 간신히 넘겼을 정도라며 글이 안 써진다고 했다. 그냥 몸과 정신이 무기력해진 채로 앉아있기만 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만치 더우면 일도, 걷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모두 증발해 버리고 마는 것인가. 덧붙여 쎄하게 들려오는 맺음말은, "어쩌면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지도 모른대요. 그렇다면 내년은...?"
포기 안 하면 실패도 없는 법
여튼간에 참으로 신묘하고도 위안이 되는 처방전이 아닐 수 없다. 오롯이 내 탓이라 여겼던 마음의 짐을 남 탓, 아니 더위 탓으로 덜어내니 이리 한결 가벼워질 수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 이렇게 더운 추석은 처음이라지요.
최은경
그래, 폭염 때문이다, 폭염. 한가위도 넘긴 9월 중순이건만, 연일 34도를 웃돌며 그 기세가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데, 어제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에 왼쪽 종아리와 목덜미 등에서 긴급수혈을 당했다. 가을 모기의 주둥이는 10월 문턱 앞에서도 여전히 서슬퍼렇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허접해도 계속 끄적거리긴 해보자. 잘 쓰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기록해 두고 싶었을 뿐이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머리도 마음도 한결 나아지겠지. 그때까지 조금만 버텨보자. 포기 안 하면 실패도 없는 법이니까.
아, 달밤에 더위를 잠시 식혀줄 비가 내리고 있다. 땅을 적시는 빗소리가 들려오니 감성이 살짝 차오른다. 동시에 졸음도 몰려온다. 아이고, 이 몹쓸 바른 생활 육신아...! 비가 그치기 전에, 졸음을 잠시 물리고 단 몇 자라도 흔적을 남겨봐야 겠다. 폭염이 다시 생각을 앗아가기 전에.
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김미옥 (지은이),
이유출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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