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욱 변호사는 국보법 외길을 걸어왔다.
이필립
그는 '동네 사람'을 돕는 '동네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상담 책상 위에는 "상담료는 받지 않습니다. 대신 이곳에 기부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적힌 안내문과 결식아동지원단체, 청소년 쉼터 등의 계좌번호가 있었다.
"변호사 업계엔 무료 상담이 더러 있어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남다른 개업을 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이웃들이 있는 봉천동에 사무실을 내보자고 생각했죠.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관악주민연대의 고 전춘우 목사님과 청소년을 돕는 일을 해왔는데, 이게 아이디어가 돼서 시작했습니다."
- 나중에 정치할 생각은 아니었나요?
"개업 때부터 받은 질문인데, 아닙니다. 국민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정치적 투쟁은 하고 있죠. 정치 활동을 위해 인권 변호사를 거친다는 것도 우리 사회의 편견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뭔가요?
"어머니께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일해왔어요. 어머니는 생활력 강하고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파출부, 식당 일 등 안 해본 게 없었죠. 저는 막내라 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요. 어머니가 제게 그랬듯, 저도 고객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한 건 한 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 가족들은 남편, 아빠의 활동을 어떻게 보나요?
"아내는 첫 만남부터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 줬습니다. 미술 하던 사람이라 학생운동과 거리가 있었을 텐데 신기한 일이죠. 그게 고마워서 교회에 가자고 하면 갑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종교의 자유는 억압받는 현실을 살고 있어요. (웃음)
아이들은 아빠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아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저와는 다른 대학 생활을 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집회·시위를 데리고 다닌 게 역효과가 난 게 아닌지 반성도 합니다. 옳은 것이라도 주입식으로 배우면 싫어지기 마련이죠."
- 회의를 느낀 적은 없나요?
"힘겹기는 하지만 25년째 보람을 느끼며 활동합니다. 맡은 사건은 항상 이전 사건보다 어렵더군요. 민변에 노동 문제 하겠다는 후배들은 계속 들어오는데 국보법은 그렇지 않아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어쨌든 저는 제 길을 갑니다."
- 책을 써서 문제를 더 알릴 생각은 안 해봤나요?
"바쁜 일상을 보내다 보니 경황이 없었습니다. 시중에 이미 좋은 책이 많기도 하고요. 올해 4월에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이철 선생의 <장동일지> 가 우리말로 출간됐어요.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가요?
"프랑스의 변호사 홀렁 베이(Roland Weyl) 선생입니다. 오랫동안 흠모하던 분이라, 한국에서 그분 100세 잔치를 열어드리기도 했어요. 한 세기 동안 당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갔던 분이죠.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진다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변호사로서 힘닿는 데까지 변론을 할 생각입니다."
-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변치 않고 한 방향으로 살아온 사람이요. 20대에 세운 뜻을 끝까지 지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초심을 지켰다는 게 제게는 최고의 칭찬입니다."
-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이 있나요?
"역사를 보면 억압 밑에서도 국민은 옳은 선택을 했고, 정의는 순리대로 실현돼 왔습니다. 한반도 평화가 오면 국보법은 폐지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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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밤이 궁금합니다. 오늘은 어떤 사건이 날 부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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