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사진 속 학생 중 한 명만 꽃목걸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윗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명숙씨.
월간 옥이네
한 학년에 두 반, 한 반에 40여 명씩 수업을 들었다. 그는 1학년은 '청반/미반', 2학년은 '선반/진반', 3학년은 '화반/순반'으로 이름붙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극심한 성차별로 여성을 위한 교육이 거의 전무하던 당시이기에, 재학생은 대체로 부잣집 혹은 교직원 자녀인 경우가 많았다. 정기적으로 월사금과 육성회비를 내야 했고, 선생님이 부잣집 자녀를 편애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일 만큼 교육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당시에 국회의원 딸과 한치봉 선생의 손녀, 또 육영수 여사의 동생도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음악·미술·가사 과목 선생님이 여성이었고, 다른 과목은 모두 남성 선생님이셨지요. 부잣집 출신이 많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죠."
가정 형편을 떠올릴 때 그는 '중산층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다만 부모님의 자녀교육열이 높았다. 대부분 가정에서는 형제자매 여럿 중 한두 명만 자녀를 학교에 보내곤 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부모님은 3남 6녀 모두를 학교에 보냈다. 그가 지내던 안터마을은 당시 120호 규모였는데, 그가 입학할 당시에는 3명, 졸업할 무렵엔 13명 정도가 옥천여중에 다녔다.
"돌이켜보면 주변에서들 부러워했어요. 우리 큰언니 때는 동네에서 한두 사람만 초등학교를 보내는 시절인데, 그때도 언니 학교를 보냈으니까요. 언니 또래 중에는 문맹자도 많았고요. 제가 죽향초 입학할 때엔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를 입으시곤 직접 데려다주시기도 했어요. 아버지한테 참 고마운 마음이에요."
동네 총각들이 딸들에게 접근할 것을 걱정해 등·하교 외에는 바깥 활동을 막기도 했던 아버지는 밭에서 일하다가도 교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래도 남아있는 아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