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켜야 할 산기슭 마을

군산 신흥동 말랭이마을 벽화로 들여다보는 그때 그 시절

등록 2024.09.25 13:20수정 2024.09.2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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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군산 말랭이마을, 주차장

군산 말랭이마을, 주차장 ⓒ 이완우


지난 22일(일요일) 이른 아침, 군산시 월명산 동편 산기슭의 말랭이마을은 여명이 걷히며 밝아지고 있었다. 전날 저녁 늦게 어둠이 깃들었을 때, 이 마을 어귀 주차장 앞에 있는 소설 속 풍경 같은 숙소에 여장을 풀었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월명산 공원 방향의 말랭이마을 왼쪽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1970년대에 머문 듯한 마을 속으로 추억 여행을 출발했다. 김수미길이라는 안내판이 보이고, 김수미집이 나타났다. 집의 벽면 벽화 마루에는 1980년부터 20년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국민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의 인상적인 캐릭터 '일용 엄니'가 앉아서 방문객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곳 말랭이마을은 김수미씨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말랭이마을은 군산 신흥동의 월명산(월명공원) 동편 월명터널 옆 비탈진 산기슭에 가로 200m 세로 100m 직사각형 모양의 터전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군산 신흥동에는 몇 채의 일본식 가옥이 근대문화 유산으로 보존되어 번듯하게 남아 있다. 말랭이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신흥동의 산동네에 자리 잡고 시대에 따라 주민들이 바뀌기도 하면서 마을 모습도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거쳐 기와집 지붕의 집으로 변화하였다.

a  군산 말랭이마을, 김수미길

군산 말랭이마을, 김수미길 ⓒ 이완우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초가집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초가집 ⓒ 이완우


말랭이마을은 근대문화 유산(일제 강점기 식민지 기획 도시의 유산)의 도시 군산에서 힘겨웠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던 백 년에 걸친 몇 세대의 생활과 역사를 펼쳐 보이고 있다.

말랭이마을 위쪽 도로에는 월명공원 산기슭에서 마을을 보호하는 높고 길다란 옹벽이 설치되었다. 이 옹벽에 마을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가 서사시처럼 벽화로 그려졌다.

이 길이 밤에 경치가 아름다운 야관경관길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옹벽에 그려진 벽화가 이 마을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해주고 있어서, 벽화 구경이 이 마을의 역사와 이 마을의 이야기를 듣는 테마 관광이 되었다.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일제 강점기 군산항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일제 강점기 군산항 ⓒ 이완우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일제 강점기 군상항 부두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일제 강점기 군상항 부두 ⓒ 이완우


말랭이마을의 벽화는 70년대 이후의 시대를 많이 보여주고 있었다. 양조장 앞의 경사진 골목길에서 손수레에 연탄을 가득 실어 힘겹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배달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던 연탄의 추억이 그리움으로 아득하다. 아이들은 볏짚으로 꼰 새끼를 연탄 구멍에 끼워서 들고 양손에 하나씩 연탄을 들고 가고, 어른들은 물지게처럼 양쪽 어깨에 무겁게 연탄을 메고 비탈길과 계단을 오르던 그 힘겨움이 되살아난다.


벽화에는 여름 한철 반짝였던 아이스께끼(아이스크림, 빙과류)를 행상하는 청소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스박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아이스께끼'를 외치며 행상하러 다니던 한여름의 풍경이 추억 속에 생생하다.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신흥양조장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신흥양조장 ⓒ 이완우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국숫집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국숫집 ⓒ 이완우


벽화에는 삼륜차가 힘차게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다. 남녀 고교생이 단정한 교복을 입고 등굣길에서 마주친 듯 아침 햇살에 슬레이트 지붕 아래 벽면에 비친 두 그림자가 이들의 멋쩍고 쑥스러운 감정을 대신해 표현하고 있었다. 국숫집 앞 의자에 남녀 중학생이 어색한 듯 가깝게 앉아 있다. 남학생 교복에 쓰인 이름이 이군산이고, 여학생은 김수미이다.


벽화에 교실 풍경이 추억처럼 펼쳐졌다. 아침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느꼈던 교실 공기의 따뜻함과 친구들과 나누는 풋풋한 웃음과 희망은 날마다 새로웠다. 별 하나, 추억 하나, 내 마음 하나, 그대 하나.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지는 교실 풍경은 과거는 오늘의 추억이고, 오늘은 내일의 추억이 될 것이었다.

1970~1980년대엔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의 주축이었던 미싱 공장이었다. 젊은 처녀들이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좁은 미싱이 얹힌 책상에 앉아서 옷감 천에서 나오는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일했다. 이런 시대를 거쳐 오늘이 있다. 말랭이마을 어느 집 담벼락에 그려진 우체통, 공중전화 부스가 고향 소식을 전해주고 있고,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포스터 옆에 '남녀 미싱사 급구'라는 구인 모집이 눈에 띈다.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삼륜자동차 (남녀 고교생)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삼륜자동차 (남녀 고교생) ⓒ 이완우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국숫집 (남녀 중학생)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국숫집 (남녀 중학생) ⓒ 이완우


말랭이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파트 단지를 오른쪽에 두고 내리막 골목길을 걸어 추억전시관, 신흥양조장, 동네 우물 등을 살펴보았다. 말랭이마을에서 벽화를 찾는 여행은 나의 과거 수십 년 전 추억을 찾아가는 여행이었다. 말랭이마을의 벽화는 수십 년 전 시대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생생한 구비문학이었다.

말랭이마을은 산기슭의 비탈에 자리 잡은 동네였다. 띄엄띄엄 오막살이 집들이 들어서면 집들을 연결하며 골목길 뒤따라 생겨나고, 공동 우물이 파였고, 구멍가게와 쌀집, 연탄 가게가 문을 열었다. 가난 속에서 희망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항구 도시 군산 신흥동 산기슭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곳, 각가지 삶의 진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곳이 신흥동 말랭이마을이다.

말랭이마을의 지명 어휘 '말랭이'는 '산비탈, 산꼭대기, 산봉우리, 맨 끝' 등을 의미하는 지역 방언이다. '말랭이'는 '산 몬당, 몰랑'이라고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좋은 땅을 빼앗기고, 산비탈에 밀려나 고난의 생존을 이어갔던 시대의 아픔과 희망이 말랭이마을에 새겨져 있었다.

말랭이마을의 골목길을 돌아보며, 말랭이 나물이 연상되었다. 무말랭이, 가지말랭이, 애호박말랭이, 박말랭이, 감발랭이, 고구마말랭이 등 물기가 많은 채소를 바짝 건조하여 오래 보관하였다가 물에 담그거나 물기를 주어 반찬으로 활용했던 지혜로운 추억이면서 현재에 있는 식재료이다. 말랭이나물이 물기를 머금으면 새롭게 살아나듯 말랭이마을은 추억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교실 풍경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교실 풍경 ⓒ 이완우


a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우체통 공중전화 영화 포스터 공원 모집 포스터

군산 말랭이마을 벽화, 우체통 공중전화 영화 포스터 공원 모집 포스터 ⓒ 이완우


말랭이마을은 일제 강점기에는 항구의 변두리 노동자 마을이었다. 말랭이마을이 자리한 앞쪽 신흥동 평지에는 일본이 주택이 잇달아 건축되었다. 말랭이마을과 대조되었다. 한국 전쟁 후에는 피난민촌이었으며, 전쟁고아의 보금자리였다. 말랭이마을은 시대에 따라 조선인촌, 근대(소설)마을, 말랭이마을로 이름이 바뀌어 왔고, 마을 집들의 형태와 건축 소재도 바뀌어 갔다.

말랭이마을 앞 신흥동에는 일본식 가옥이 근대문화 유산으로 보존되어 있다. 일본식 가옥은 둘러보아도 정서적으로 마음에 다가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신흥동의 양지바른 곳 일본식 가옥과 대조되는 말랭이마을에는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을 곳곳에 벽화가 실감 나게 그려져 있어 소중한 추억과 역사의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었다.

말랭이마을 곳곳 골목을 거닐면서 사람 사는 동네의 따스한 온기를 느꼈다. 서민들 애환 깃든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말랭이마을은 오늘도 숨을 쉬고 있는 마을이어서 마을에 그려진 벽화가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말랭이마을의 벽화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식 건축물보다 정서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졌다.

a  군산 말랭이마을 안내도

군산 말랭이마을 안내도 ⓒ 이완우


a  군산 신흥동 일본인 가옥, 근대문화 유산

군산 신흥동 일본인 가옥, 근대문화 유산 ⓒ 이완우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군산 월명산 산기슭 말랭이마을을 돌아보면서 상상했다. 한 편의 시가 전문 그대로 마을에 펼쳐져 있는 듯하다고. 월명산 산기슭의 말랭이마을이 풀밭이 되어 바람에 나부끼고 스스로 일어나고 있었다. 군산의 말랭이마을은 마을 이름부터 마을의 역사, 희망과 꿈까지 모두 소중한 기념물이고 문화유산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침 햇살은 더욱 밝아졌고, 말랭이마을은 더욱 환해졌다.

a  군산 말랭이마을, 양조장

군산 말랭이마을, 양조장 ⓒ 이완우


#군산말랭이마을 #일용엄니김수미 #군산말랭이마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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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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