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진신혼시절의 정진동 조정숙 부부. 아기는 첫째 딸 정광옥.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신부 입장"과 동시에 풍금 소리가 울렸다. 하얀 면사포를 쓴 천사 같은 조정숙이 예식장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만 열아홉 살 신부는 기쁜 마음보다는 쑥스러움이 앞서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청원군 강내면 다락교회에 꽉 들어찬 하객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락교회(1912년 10월 10일~)가 만들어진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락교회 교인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다락리 딸부잣집 조춘흥 맏딸이 신식 결혼한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당시 대부분은 전통 혼례로 식을 올렸는데, 신식 결혼을 한다니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했다.
특히 꼬맹이들이 신났다. 친구 순형(당시 다섯 살)이 언니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예식 한 시간 전부터 교회에 입장했다. 맨 앞줄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꼬맹이들은 정작 식이 시작되기 직전 뒷줄로 밀렸다.
"여기는 신랑·신부 가족들이 앉는 곳이여"라며 뒷줄로 쫓겨났다. 꼬맹이들은 깨금발을 하고 천사 같은 신부와 멋진 신랑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담임목사의 주례사와 축하 노래 등이 이어졌고, "신랑·신부 행진" 소리에 꼬맹이들이 주먹에 움켜쥔 꽃가루를 날렸다.
첫날 밤의 설교
정진동과 조정숙이 다락리 주민들의 축하 세례를 받은 때는 전쟁의 참화가 가시기 전인 1954년 10월이었다. 신랑신부의 첫날 밤은 세인들의 관심거리였다. 볼거리, 오락거리가 없고, 라디오도 전무 했던 시절 신랑신부의 첫날 밤 구경은 최고의 흥밋거리였다.
'북'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혼 방 문종이가 여기저기 뚫렸다. 잔뜩 기대를 했던 마을 여성들은 1시간째 동그란 눈을 뜨고 방안을 살펴봤지만 어떠한 진척(?)도 없었다. 개다리소반에 전과 떡, 과일, 약주가 있었지만 신랑신부 누구도 입에 대지 않았다. 둘 다 크리스찬이라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기름진 음식에도 젓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신랑 정진동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종이 잡히지 않았다. 결혼 전 연애 경험도 없었고, 당시 성교육이란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결혼식 며칠 전 어머니한테 첫날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충 들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사실 말하는 어머니나 듣는 아들이나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어머니한테 자세히 들을 걸' 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게 또 몇 시간을 보냈다. 정진동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여보"라며 시작한 그의 말은 사랑의 속삭임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긴 설교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둥지) 있는데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했다. 구체적으로는 "당신은 나를 선택하여 결혼을 했는데, 나는 목사가 되어 예언자의 길을 가야 할 것이오. 그 길은 배고프고 박해받는 힘든 고생길인데 함께 가야 하오." 이렇게 일방적인 생각을 털어놨다.
"예수는 집도 월급도 없이 혼자 몸으로 평생을 민중과 함께 사시다가 민중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의로운 분이오, 나는 그 예수의 뒤를 따를 제자로서 이제 당신과 함께 그 힘든 고난의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했소"라고 설교를 길게 했다. 그리고 나는 첫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 정진동, <저 평등의 땅에>, 1992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신랑의 모습이다. 첫날밤 아내를 상대로 긴 설교를 하는 사람(목사)이 또 있을까? 정진동이 언제부터 민중 선교의 사상이 형성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대한신학교 1학년 때인 1954년도에 결혼하면서 이미 자신의 가치관·신앙관이 명확히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창하게 민중신학이랄 것은 없지만 성경을 통해 민중의 삶을 산 예수를 만났고, 그의 제자로써 평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한 것이다.
강행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