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산 입구, 주차장 우측 숲속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 전경
최희신
"나중에 독일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에 가본 적이 있는데 꼭 비슷하게 생겨서 놀랐던 기억이 나요. 침대도 없고 그냥 시멘트 바닥에 한 20명이 같이 잤거든요. 그날 나는 돌도 안 지난 아들을 기지촌 다른 아줌마에게 맡겨놓고 나왔던 거라 걱정이 돼서 밤에 한잠도 못 잤어요. 끌려가지 않은 친구가 급히 의정부로 돌아가 수소문을 했는데 그때 하필 남편도 부대 밖으로 훈련을 나가 있어서 연락도 안 됐더라고요."
그날 김씨가 밤을 지새워야 했던 곳은 건물 2층 3번방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1층으로 내려가 수십명이 줄을 지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2층은 자는 곳, 1층은 주사 맞는 곳이었다. 김씨는 동두천 성병관리소 직원에게 누차 성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기지촌에선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 약이 독해 애를 못 낳게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난 그때 이미 아들이 하나있었지만, 실제 이후로 아이를 더 낳으려 했는데 안 됐어요. 두 번이나 유산을 했으니까. 그때도 페니실린 때문에 임신 못 한다고 말하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다들 싫다는데도 그렇게 줄을 세워놓고 주사를 많이 맞혔던 걸 보면, 아마 성병관리소가 나라에서 돈을 더 많이 타먹으려면 사람 수나 건수를 늘려야 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나는 기절하는 언니만 봤지만, 주사 맞고 쇼크 와서 죽은 언니들도 있댔어요."
김씨는 그곳에서 꼬박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김씨가 지냈던 의정부 기지촌에도 성병관리소가 있었지만, 동두천 성병관리소의 시설이 더 열악했다고 했다.
이렇게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국가가 관리한 성병관리소는 경기도에만 6곳, 전국에 40여 곳 있었다. 이 중 아직까지 건물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김씨가 기억하고 있는 동두천 성병관리소다. 오늘날 단풍철마다 인파로 북적이는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등산로 입구 인근에 그대로 방치돼 있다.
1973년부터 1996년까지 운영된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실제 매주 성병 검사를 받아야 했던 기지촌 여성들이 양성 반응이 나오면 강제로 격리 수용되는 곳이었다. 김씨 증언대로 2층짜리 건물에 20명씩 들어가는 방이 7개, 총 140명까지 수용됐다고 한다. '낙검자 수용소' 혹은 '몽키하우스로' 불렸다. 검사에서 떨어지면 가는 곳, '원숭이'처럼 갇히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성병관리소는 국가가 주한미군을 상대로 하는 기지촌 성매매를 사실상 조장해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삼았음을 뒷받침하는 가장 대표적인 물증 가운데 하나다. 기지촌의 역사는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1950년대로 거슬러 오른다. 지난 2022년 9월 대법원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 100여 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의 기지촌 조성·관리·운영 행위 및 성매매 정당화 및 조장 행위는 구 윤락행위방지법을 위반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권 존중 의무 등 마땅히 준수돼야 할 준칙과 규범을 위반한 것"이라며 기지촌을 만든 건 국가였고, 이는 잘못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당시에도 성매매가 법으로 금지돼 있었음에도 국가가 미군 기지 주변을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예외구역으로 공식 허용하면서 기지촌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특히 국가의 성병관리소 운영 역시 위법하다고 명시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법령상 근거 없이 이뤄진 격리수용 치료나 의료 전문가의 진단이 없어 전염병환자라고 볼 수 없음에도 이뤄진 격리수용 치료 행위는 법령과 인권 존중 의무 등을 위반하고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하여 위법하다"고 했다.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만 남겨주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