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작은도서관성산동에서 10년 이상 동네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김세희
'와글와글작은도서관'은 결론적으로 2023년 문을 닫았다. 하지만 문 닫기 전 그 2년간, 나는 일주일에 한번 도서관에 출근해 아이들을 맞았다. 신간도서를 주문하고 관리했고, 독서지도사 선생님, 운동 선생님을 섭외해서 수업을 했다. 동네를 오갈 때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마지막 해, 와글와글작은도서관은 조용한 날이 많았다. 그런 오후에 빈 도서관을 지키고 있을 때 벽에 새겨진 아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 봤다.
이곳이 어디인가, 나는 어쩌다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까, 불시착한 기분을 느꼈다. '공동육아어린이집 왔다가 마을도서관 지킴이 된 썰' 같은 제목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했다.
이런 나의 경험이 사회에 전달될 수 있을까. 어떤 맥락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나는 비장한 뜻을 품고 도서관 운영에 참여한 게 아니었고, 많은 기여를 하지도 않았다. 비상업적인 공공장소, 마을공동체를 지키려는 발버둥이라고 하기엔 뜨뜻미지근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도서관에 나가 아이들을 맞았다.
나는 원래 말이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생각해보면 어린이야말로 '다른 논리'로 움직이는 존재다. 어느새 그 논리에 익숙해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트레드밀에 복귀하기는커녕, 완전히 튕겨져 나가서 불시착한 것만 같은 날들. 커리어가 될 수 없는 시간, 뭐라고 의미화하기 미묘한 시간.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신체적 감각과 우정이 교차했던 날들이었다.
그저 달리는 것 말고 더 중요한 것, 내게는 '이웃'이었다
세 살에 공동육아어린이집에 입소한 아이는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어느덧 내년에 다닐 초등학교를 궁금해 한다. 최근에는 혼자서 샤워할 수 있게 되었고, 이치에 맞는 말도 곧잘 하게 되었다.
아이가 자라는 사이, 내 곁에는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가끔 이 사람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나 지인들에게 '우리 어린이집 엄마아빠'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러나 가족만큼이나 많은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자주 보면서도 내면의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 이 글을 쓰는 지금, 어쩌면 오래전 실종된 '이웃'이라는 호칭이 우리 관계를 칭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들과 주말에 공원에 간다.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년기부터 타고 있던 트레드밀, 그런데 나는 이걸 왜 타고 있는지 의심해본 적이 없다. 더 열심히, 더 잘타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도 그런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속도와 방향에 조금은 의문을 품게 됐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손실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정부의 정책에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손실이라고 보는 입장이 읽힌다. 단적으로, 교육부가 야심차게 빌어붙인 '늘봄교실'은 부모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저 아이 돌보는 '손실'을 줄여주겠다는, 트레드밀 위를 달리는 데 육아가 '방해'가 되지는 않게 만들어주겠다는 취지의 정책이다. 하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기쁨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할까.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점점 아이를 낳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