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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와 수영 강사에게는 한 번도 듣지 못한 말

요가원 다닌 지 2개월... 알 수 없는 말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등록 2024.10.02 10:07수정 2024.10.0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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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외국어를 배운 지 두 달차다. 이 외국어는 요가 아사나(자세) 수련 할 때 쓰는 선생님의 언어다. 한국어이지만 외국어만큼 새롭다.


코로나 시절, 집에서 유튜브 요가를 해본 적이 있다. 유튜브 선생님은 어떤 한 자세에서 '버티세요'라고 했다. 요가원에서 같은 자세가 나왔는데 선생님의 다른 문장이 꽂혔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봅니다."

마법이 일어났다. 요가원이 갑자기 낯선 여행지가 됐고 나는 그곳에 묵어가는 여행자가 된 것이다. 단어가 주는 힘이었다.

'버티다'의 국어사전 정의는 '어려운 일이나 외부 압력을 참고 견디는 일'이다. 반면 '머무르다'는 '도중에 어떤 곳에 멈추거나 일시적으로 어떤 곳에 묵다'라는 뜻이다.

버티는 건 외부 힘이 작용하는 반면 머무르는 건 온전히 내 의지다. 여전히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이게 온전히 내 의지라는 마음이 들자 '버티는' 것보다 덜 힘들었다.


 강아지들도 이리 머물고 있으니 나도 그래봐야지
강아지들도 이리 머물고 있으니 나도 그래봐야지최은영

버틸 때는 숫자를 천천히 세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머물 때는 선생님 숫자에 상관없이 아사나를 완성하려고 한 호흡 더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같은 동작이 말 한 마디로 달라지니 어찌 마법이 아니겠는가.

데미안에 나온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내디뎠던 걸음들'을 시각화 하면 요가 아사나에서 머무르는 이 모습이 아닐까 싶다. 초급반 주제에 뭐 그리 거창하냐고 반문한다면 요가는 내가 몰랐던 내 몸을 들여다본다는 걸 먼저 말하고 싶다.


그 들여다봄이 결국 나에게 다시 오기에 데미안 구절이 소환됐다. 데미안을 읽을 때 그 구절은 추상적 관념이었다. 요가에서는 매우 실제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 등과 엉덩이, 골반으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팔을 뻗을 때 골반이 밀어줄 수도 있음을 요가로 배운다.

 운동하러 가서 외국어를 깨치는 중이다
운동하러 가서 외국어를 깨치는 중이다최은영

초급반에서는 '머물다'를 배웠다면 기본반에서는 '충분하다'를 배운다. '사람 몸이 저렇게 된다고?' 싶은 아사나는 절대로 한번에 하지 않는다. 아주 기초부터 하나씩 쌓아 올라간다. 기초반에서 봤던 아사나까지 간 후 선생님은 "거기까지만 하셔도 충분히 좋고요. 선택지를 드립니다" 하면서 다음 동작을 설명한다.

헬스와 수영 선생님들에게는 '충분히 좋아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무게를 더 올려야 하고 속도를 더 내야 했다. 도저히 안 되면 아쉽다는 듯 다음에 하자고 했다. 내가 의욕에 넘칠 때는 그게 목표가 됐지만 어느 날은 부담감에 안 가고 싶었다.

요가 선생님들은 당최 욕심이 없는 건지 더 가자는 소리를 안 한다. 늘 충분하다고 한다. 그 말이 또 묘하다. 청개구리 본능을 자극한다. 머물러도 충분하다는데 나는 더 가겠노라 낑낑댄다.

스트레칭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가볍게 온 몸이었다. "충분해요." 마법에 걸린 나는 한 스텝 더 하다가 온 몸이 탈탈 털린다. 몸은 털렸고 마음은 고요하게 발랄해진다.

요가어는 나도 모를 자발성을 슬금슬금 꺼내준다. 그 자발성은 발랄이 고요함과 손잡게 한다. 신묘막측한 외국어다.

 양초도 가부좌를 트는 요가원
양초도 가부좌를 트는 요가원최은영

마무리 전에 선생님은 꼭 이 말을 추가한다.

"내면으로 의식을 가져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먼저 해주세요."

요가원에 온 것도 나이고 한 시간 수련도 내가 했는데 뭘 또 나한테 고맙지? 싶었다. 완벽한 한국어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말을 주 4-5시간씩 두 달 간 들어서 일까. 갑자기 귀가 트였다. '나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온 몸 근육으로 알려준 내게 고마워졌다.

그날 처음으로 합장한 채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데 콧날이 시큰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요가는 셀프 돌봄의 한 방법이었다.

 임시 공휴일이지만 오전 수련은 있다고 해서 얼른 달려갔다
임시 공휴일이지만 오전 수련은 있다고 해서 얼른 달려갔다최은영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많다. 복부를 지퍼 채우듯 잠그라는 말도 모르겠고 갈비뼈 사이에 숨을 채우라는 말도 모르겠다. 모르지만 기꺼이 더 헤매보려고 한다. 언젠가 귀가 열려서, 혹은 몸이 트여서 그 말을 반갑게 맞이할 거라는 기대를 한다. 그런 시간이 가지런히 내 앞에 쌓이면 나는 더 또렷해지겠지. 요가를 수련이라고 하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요가 #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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