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간송미술관 외부 전경.
김용관
대구 강연을 준비한 이는 김현근씨다. 이제는 대구 민주진영의 원로 인사가 된 김현근은 나의 옛 벗 고우(故友)이다. 1978년 6월, 광화문 시위라는 게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당시의 긴급조치 9호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캠퍼스에서 하던 시위를 청와대 목구멍 밑인 광화문에서 감행했다.
친구 김현근은 이 시위에서 앞장을 서다 감옥에 갔다. 다시 1978년 10월, 2차 광화문 시위를 우리는 기획했다. 나는 이 2차 시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으니 김현근과 나는 '광화문 시위의 동지'인 셈이다.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도 우리는 함께 노동운동을 하였다. 일제 강점 36년의 세월이 긴 시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와 김현근은 민주화운동 46년의 세월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차가 대구의 수성구에 당도했고, 친구는 약속 장소에 먼저 와 있었다. 시월의 가을은 으레 천고마비의 가을이건만, 오늘의 대구 하늘은 유난히 맑고 햇살은 눈이 부셨다. 역시 간송미술관이었다. 멀리 팔공산 산줄기가 대구를 은은하게 감싸고 있었고, 팔공산의 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간송미술관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구는 광주와 달리 도시 공간의 여유가 있었다.
"신윤복의 미인도는예,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야 됩니다. 머리에 올린 이 가체 있잖습니까? 자세히 보시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붓으로 그린 것을 알 수 있어예. 가슴엔 찬 저 호박노리개 보세요. 얼마나 생동감이 있습니꺼? 빛이 나잖아요. 이게 진품 미인도의 맛이 아니겠습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안내자의 해설을 들으니 미인도의 멋이 달리 보였다. 간송미술관을 안내하는 이는 허경도 박사(고문화재 수리가)이다. 20대 때에는 대구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30대 때에는 진보정당운동의 앞장을 맡았다. 대구 달성구에서 박근혜와 한 판 선거 싸움을 벌인 나의 후배이다. 40대 때부터는 한옥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이후 문화재 관리사가 되었고, 지금은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고건축을 강의하고 있다. 음성이 카랑카랑하여 듣는 이에게 쾌활한 기운을 주는 친구이다.
우리는 허경도 박사의 안내를 받아 훈민정음 해례본 앞에 섰다.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앞에 서니, 왠지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훈민정음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우리들은 학교 종이 땡땡 치면 "I am a boy. You are a girl." 씨불이지 않았을까? 도시의 온갖 간판이 영어 단어를 쓰고 있는 이 망국의 시대에 훈민정음 원본 앞에 서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저 해례본을 찍은 목판이 소백산 어느 절에 소장되어 있었는데요.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그 절을 불태우면서, 하나밖에 없던 해례본 목판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허경도 박사에게 여정남 흉상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여정남은 경북대 출신 민주인사인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선고 다음 날 4월 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분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여정남 선배의 흉상이 경북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낯선 대구에 혼자 와서 참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 경북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후배 허경도를 만나니, 만사 제치고 참배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경북대학교에서 만난 민주화운동가 여정남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