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산업선교회정진동이 도시산업선교 실무자교육을 받은 영등포산업선교회
영등포산업선교회
"강사가 조지송 목사네!"라며 환한 웃음을 지은 정진동은 11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장로교 신학대학(아래 장신대)에서 만난 그는 자기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그는 매사에 논리정연했다. 성질이 급하고 감성적인 자신과는 달리 말이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서 정이 묻어났다. 자신과 나이가 같은 황해도 황주 출신의 조지송(1933년생)은 순수 그 자체였다. 진천 덕산교회 청년들의 문제 제기로 편입학한 장신대에서 그와 깊게 사귈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별과(別科)로 입학한 정진동은 1961년, 1년 만에 졸업을 했다.
대한신학교 졸업(1958년)과 동시에 그는 농촌선교의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인 호죽교회로 향했다. 호죽교회(1958~1960)와 뒤이은 덕산교회(1961~1972년 봄)에서 '농민이 예수다'라는 마음으로 농촌선교를 했다. 배움의 기회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공민학교를 세웠고, 농촌부흥운동을 했다.
정신없이 사는 사이에 농촌선교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신대 졸업한 지 11년 동안 조지송을 만난 적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예수교장로회 충북노회에서 조지송 특강을 마련한 것이다.
덕산교회서 아침부터 부리나케 서둘렀지만 정진동이 특강 장소에 도착한 것은 조지송이 마이크를 막 잡았을 때였다. 깔끔한 외모의 그가 신학교 졸업 직후 강원도 태백의 장성탄광에서의 노동 체험을 이야기했다.
"탄가루와 땀이 범벅이 돼서 얼굴은 진흙 팩을 한 꼴이야... 흰 눈동자만 보이지. 침을 뱉으면 탄가루가 섞인 시커먼 침이 나왔어. 점심때가 돼 도시락을 찾아 먹어야 하는데 탄가루가 내려앉아 어디가 도시락인지 구분돼야지. (…) 손으로 쓸어서 먹었어."(서덕석, <조지송 평전>, 2022)
전태일 시대
정진동은 자신이 탄광에서 일해본 경험은 없지만 조지송의 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농촌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자신보다 큰 지게를 지고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연장에 앉아 있는 대부분 목사와 참석자들은 강사를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아서다. 그런데 이어진 이야기에 정진동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청년 전태일이 '나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몸을 불사른 것이 재작년입니다." "작년에는 한영섬유의 김진수가 노조 탈퇴 요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측의 정OO한테 드라이버로 머리가 찍혀 사망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전태일(1948~1970)과 김진수(1949~1971) 모두 갓 스물이 넘는 나이에 산업화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탄광지역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정진동이 도심 한복판에 지옥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이들이 동료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겨 지지 않았다. '예수가 현세에 있다면 전태일과 김진수가 예수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조지송의 마지막 이야기가 정진동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는 산업화 시대입니다. 공장과 산업지대에 가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도시산업선교의 필요성을 주장한 군더더기 없는 설교였다. 한국 사회는 1950, 1960년대의 농경사회에서 1970년대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걸맞는 산업선교를 제기한 조지송은 1963년 한국 최초로 '산업전도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장신대 졸업 후 농촌선교와 산업선교에서 각각 10여 년간 활동한 정진동과 조지송이 만난 것은 1972년 초 청주에서였다.
그 시절의 취업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