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안채와 사랑채 뒤에 대나무 숲과 아울러 장독대가 있다.
오명관
1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난초를 기르며 건강의 회복에 진력했으나 회복은 늦었다.
와병 초에는 언어 기능의 마비 등 중태였으나 차츰 회복이 되자 다시 대학원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 강의를 하였다. 1958년 3월로 대학원 강의도 마무리 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병환 조리를 하는 중에도 학술원 공로상(1960)과 문화포장(1962)이 수여되었고, 전북대학교에서는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1961) 그리고 서울과 전주에 가끔 나들이도 하였다.
1963년 전라북도에서 정읍군 황토현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우고자,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던 바, 가람은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3일, 이 탑이 완성되어 제막식을 가질 때, 가람은 이 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주석 1)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시조에 심회가 담긴다.
백 묵
몸을 담아 두어 마음은 돌과 같다
봄이 오고 감도 아랑곳 없을러니
바람에 날려든 꽃이 뜰 위에 가득하구나
뜰에 심은 나무 길이 남아 자랐도다
새로 돋는 잎을 이윽히 바라보다
한 손에 백묵을 듣고 가슴 아파 하여라. (주석 2)
병 석
비인 마룻장에 해가 가득 비쳐들고
후루룩 내려 앉아 짹짹이는 참새들을
이 놈과 저 놈의 소리 들어보고 알리라
분에 옮긴 국화 빼어 나온 두 송이
어인 병에 들어 찬바람을 이는 이 때
피랴다 피들 못하고 시들시들 하느뇨. (주석 3)
고곰(학질)
몸이 한가로우애 도리어 병은 잦다
보던 글 던져 두고 상머리 홀로 누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잔시름만 하도다
몸이 아픈 곳을 스스로 헬 수 없고
깃보다 가벼운 맘 허공으로 떠오르노니
흐릿한 별과 구름은 머리맡에 어르이다. (주석 4)
주석
1> 최승범, 앞의 책, 66쪽.
2> <가람 시조산>, 63쪽.
3> 앞의 책, 64쪽.
4> 앞의 책,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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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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