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양산항의 집터. 조선수군 재건하던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많이 손에 넣은 집이다.
이돈삼
의금부에서 풀려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고 있을 때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대패하면서 궤멸됐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남았다.
위기를 느낀 선조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순신이 수군재건 첫발을 뗀 날이 1597년 음력 8월 3일, 군관 9명 병사 6명과 함께였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구례, 압록을 거쳐 옥과, 곡성으로 이어진다.
순천에선 대포와 화약, 다양한 화살을 구하고 보성에선 군량미를 많이 확보한다. 이순신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이 당시 조양창이 있던 조성면 고내마을과 득량면 박곡마을 양산항의 집이다.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구하고,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보성에 온 이순신한테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교서가 전달됐다. 조선수군이 너무 미약하니 육군에 합류해 싸우라는 '조선수군 철폐령'이었다. 음력 8월 15일 추석날의 일이다.
이순신은 밤새 고민 끝에 임금에 장계를 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고, 신이 죽기로 싸운다면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보성 열선루에서다.
보성에 이순신이 많은 군량미를 확보한 조양성과 양산항의 집터가 조성면과 득량면에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쓴 보성 열선루도 복원돼 있다. 보성읍내엔 장계를 쓰는 이순신의 모습을 떠올려주는 이순신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