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의 조순형 전도사중학교 때 친구, 조카와 함께 한 조순형(가운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책보를 둘러매고 집으로 향하는 소녀 순형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가 상급학교(중학교)를 보내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동막리와 주변 마을에 사는 대다수 친구들이 상급학교에 갈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순형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잔심부름하고 부엌데기처럼 사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소녀는 몇 달 동안 고민했던 것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영자야(가명). 우리 시험 공부하자!" "뭐 하려구?" 순형의 제안에 영자는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돈이 없어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텐데, 뭐하러 공부하냐는 생각에서였다.
순형이 상급학교 보낼 꺼유?
하지만 순형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상급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면 호죽의 공민학교(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에 갈 거야!" "정말?" 순형의 말에 영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순형의 야무진 성격을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순형은 친구들이 시험 공부하는 것을 엄두를 내지 못하자 혼자서 시험을 준비했다. 만약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아버지가 상급학교에 보내주지 않으면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에 있는 공민학교에 가겠다는 배수진을 치고서 말이다.
그런데 순형은 어떻게 그런 파격적인 생각을 했을까? 동막에서 호죽리까지는 약 40리(17km)나 되는 거리인데 말이다. 거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큰언니 조정숙이 정진동과 결혼해 호죽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른 후 소녀 순형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런데 소녀의 엄마 박금순은 한술 더해 마음이 새카맣게 탔다. 딸래미가 상급학교 시험에서 합격했다는데, 남편한테 상급학교 입학 문제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금순 모녀가 가슴앓이를 하던 어느 날 작은골 사는 김OO이 찾아왔다. 이내 개다리소반에 술상이 차려졌다. 술이 얼근하게 됐을 때 김씨가 입을 열었다. "순형이 상급학교 보낼 꺼유?" "..." 김씨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빠 조춘흥은 멀뚱멀뚱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김씨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순형이 입학 안 시킬 거면 내 딸래미 보내려구요." 김씨는 순형이가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면 자신의 딸을 상급학교에 보내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상급학교 입학은 정원이 있기에 순형의 입학 여부가 중요했던 것이다. 술자리에서 조춘흥은 입을 다물었다.
김씨가 돌아간 후 조춘흥이 딸 순형을 불러 앉혔다. "어떤 놈은 (상급학교 시험에) 떨어졌는데도 보내려구 하는데, 누구는 합격했는데도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순형은 그때까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의 이어지는 말에 순형의 입이 귀에 걸렸다. "순형아. 중핵교(중학교) 가거라!"
경찰 목덜미 잡아당겨
다음날 박금순은 쌀장수에게 쌀을 팔아온 돈을 순형이 손에 쥐어줬다. "아부지 맘 변하기 전에 얼릉 입학금 갖다 내거라" 그렇게 해서 조순형은 미호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순형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3년 후 고등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물론 이때는 순형의 부모뿐만 아니라 순형 자신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해서 마냥 구들방 신세만 질 수는 없었다. 청주시 서문동에 있는 편물학원을 3개월간 다녔다. 집안 언니의 편물 가게에서 일했는데 돈벌이가 안 됐다. 그는 그곳을 때려치우고 한복학원에 다녔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한복을 입는 여성들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재봉틀로 한복을 지어 시장에 납품했다. 한복은 예상보다 잘 팔렸다. 돈은 벌었지만 순형의 마음은 허전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 나이 24세 때인 1972년도에 일신여고에 입학했다. 7세 차이 나는 동생들과 같이 다니는 학교생활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순형은 1년도 채 못 다니고 학교를 작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