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신문
또한, 한국전쟁 때의 한강철교 잔해를 가져다 만들었다는 최초의 완도대교가 철거된 이후 철거물이 어디 보존돼 있는지도 궁금했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아도 명확히 찾을 수 없었는데, 부임 이후 완도군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완도군지(郡誌)와 완도읍지(邑誌), 군외면지(面誌) 등의 책을 보고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완도군지는 1925년 12월 28일 최초 발간된 이래 50여 년이 지난 1977년에 두 번째, 1992년에 세 번째, 2010년 네 번째 군지가 각각 발간됐다. 완도군립도서관에서는 1992년판과 2010년판 군지를 열람할 수 있었다. 2010년판 군지는 분량이 1270여 쪽에 이르며, 완도의 역사와 민속, 행정, 사회, 교육, 문화, 산업과 경제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완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3가지 정도의 설(說)이 있었다. 첫째 이 지역이 초목이 무성하여 왕골같다 하여 '왕골 완(莞)'을 지명에 사용하였다는 설, 둘째 산림이 울창하므로 궁궐재목 생산을 위한 국원(國苑)으로 지정함으로써 원도(苑島)가 완도(莞島)로 와전되었다는 설, 셋째 851년 벽골군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의 타향살이에 시달린 청해진 유민들이 고향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여 '빙그레 웃을 완(莞)'이 지명에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는 설 등이다.
군지에서는 셋째 설이 맞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완도는 원래 신라 이전까지는 '좋은섬(助音島)'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823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한 장보고 장군이 동북아 바다를 호령하는 해상왕으로 등극하였는데, 국제 해양 무역기지이자 신라를 약탈하는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기지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참고로 청해(淸海)는 '바다를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이며 당풍(唐風)의 명명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라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쟁탈전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846년 장보고 장군은 염장이라는 사람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관리되다가 851년 철폐되었으며, 청해진 주민들은 벽골군(碧骨郡, 전북 김제)으로 강제로 집단이주되었다.
이때 집단이주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청해진 주민들이 고향 생각을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고 하여 완도가 지명으로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40여 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지명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는 그리움에서 자생된 섬이름이 완도로 변했고, 고려시대에 들어서 지방제도의 변화에 편승되어 정착된 것으로 본다.
이후 조선 고종 33년(1896년) 완도군 군내리에 완도군청을 짓고 영암, 강진, 해남, 장흥 등에 속해 있던 섬들을 통합하여 완도군을 행정구역으로 설치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완도의 군목(郡木)은 동백나무, 군화(郡花)는 동백꽃, 군조(郡鳥)는 갈매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