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데비 아이독일 빈데비에서 발견된 아이 미라
비룡소
첫 장을 넘기면 천으로 눈을 가린 미라 사진이 양면을 채운다. 독일 북부에서 발굴된 2,000년 전 시신 '늪지 미라'로 작가가 영감을 받은 사진이기도 하다. 작가는 '토탄이란 별난 물질(13쪽)'에 갇혀 뜻하지 않게 미라로 남은 이유를 밝히면서 1부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고고학처럼 읽히다가, 작가가 미라에 감정이입하면서 에세이로 급변한다.
모두에게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도 있고, 당신에게도 있고, 우리 집에 오는 우편배달부에게도 있다. 노쇠한 이웃 노인에게도 있고, 슈퍼마켓에서 내 뒤에 줄 서 기다리는 여자에게도 있고, 방금 막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남자아이에게도 있다. - 16쪽
작가는 미라에게 '에스트릴트'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 부분이 2부 '에스트릴트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곧바로 정하지 않았다. 그저 봄날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나선 어린 여자아이를 상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 아이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으리라. 어쩌면 행운과 상상력의 도움으로, 어느 생각지 못한 곳에 이를지도 모르리라. - 25쪽
이처럼 작가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야기의 처음을 시작한다. 2천 년 전의 마을을 만들고 등장인물을 만든다. 그리고 사건을 만든다. 그녀가 왜 눈이 가려진 채 늪에 빠져 죽었는지. 이 과정에서 작가는 그녀를 여전사로 만든다.
'수척해지고 너무 빨리 늙어 버리는 그저 또 한 명의 여자, 아내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소녀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여자를 하찮게 여겼다. 에스트릴트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에 에스트릴트는 다른 여자처럼 자신의 운명을 그냥 두지 않고 바꾸려 한다. 남자처럼 강해지려고 틈만나면 방패 훈련을 한다.
하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진취적인 그녀는 끝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늪에 빠져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자연을 사랑하는 파라크라는 또래의 남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묶었던 천을 주며 그녀의 눈을 가려 달라고 한다.
에스트릴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꼼짝없이 늪으로 끌려갈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어둠이라는 선물이 고마웠으므로.
- 116쪽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3부 에세이로 넘어간다. 여기까지 읽으면 또 페미니즘이야? 하면서 식상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토탄층에서 미라를 최초로 발견한 시기는 1952년이다. 세월이 흘러 최신 과학 기술인 DNA 분석, 컴퓨터단층촬영 기술 등을 이용하여 미라를 다시 분석해 보니, 여자가 아닌 남자아이 시신이라는 게 밝혀진다.
작가는 남자 아이를 주인공으로 다시 쓰면서 4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주인공의 이름이 '파리크'다. 전편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에스트릴트가 죽기 직전 자기의 머리를 묶고 있던 천을 그녀에게 주어 눈을 가릴 수 있게 하여 '어둠의 선물'을 준 그 소년. 파리크는 에스트릴트가 전사 훈련을 할 수 있게 방패를 구해다 주고, 훈련을 직접 돕기까지 했다.
에스트릴트와는 달리 파리크는 나약했다. 파리크는 아주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대장간에서 잔심부름하며 지낸다. 몸이 불편하고 병약하여 대장간의 주된 일을 할 수 없어 항상 꾸지람을 받는다.
하지만, 파리크는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죽은 동물의 뼈를 세심히 관찰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터득했다. 그리고 생명체에 대한 연민이 가득했다. 곧 끔찍하게 죽을 에스트릴트에게 눈을 가릴 수 있게 천을 건네준 것처럼. 그리고 점차 나약해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다(왜 죽었는지는 책을 읽어보면 알 것이다).
파리크와 부엉이의 머리 위로 신비로운 늪의 불빛이 환영의 춤을 출 것이다. 파리크와 부엉이는 잠드는 것이 아니다. 아니고 말고! 함께 불빛들을 지나 스르르 공중으로 올라갈 테니까. 훨훨 날아오를 테니까. - 177쪽
생명체로 태어났으면 모두 죽는다. 니체는 말했다. 죽음은 삶의 파멸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라고. 잘 죽으면 그의 삶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비참한 죽음도 있고, 행복한 죽음도 있으며, 허무한 죽음도 있고, 의미 있는 죽음도 있다. 작가는 두 개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완성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지막 5부는 다시 작가의 입을 빌린 에세이다. 소설이니까 결말을 바꿔 그들(에스트릴트와 파리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결말을 내리고 싶었지만 작가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나는 결말을 바꾸지 않았다. 허구이지만,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를 지었으니까. 역사에서 어느 아이가 죽었으니까.
- 182쪽
작가는 두 아이의 죽음을 이야기했지만, 미라는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은 살아남았다. 누가 살아남았는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작품을 끝까지 읽으면 대작가 로이스 로리가 87년 동안 갈고 닦은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7만 년 현생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삶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이 찰나의 삶이 역사에 남는다는 사실을, 더불어 찰나의 삶이지만, 니체의 말처럼 멋진 '삶을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작가 소개
로이스 로리는 1937년 생으로, 대표작으로는 SF의 고전 반열에 오른 <기억 전달자>가 있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어린이·청소년 문학상인 뉴베리상을 2회 수상한 영미권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 작가이자 세계적인 스토리텔러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최초의 아이
로이스 로리 (지은이), 강나은 (옮긴이),
비룡소, 202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상청에서 24년간 근무했다.
현대문학 장편소설상과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공유하기
2000년 전 '늪지 미라'에서 시작된 이야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