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낭염 때문에 면도는 매일 내게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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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자신감으로 수염을 기르고 있을까? 수염을 기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피부 트러블로 인한 괴로움이 커서다. 원래 매일 면도를 했는데 몇 달 전부터 면도하는 게 엄청 괴로워졌다.
꾸준히 나를 괴롭혀 온 모낭염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입술과 턱 사이 중앙에 모낭염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한 번 생긴 모낭염은 사라지지 않았다.
면도를 하면 할수록 더 심해졌다. 나름 달래 보겠다고 관리도 해주고 연고도 발라보았다. 부풀어 올라 터지고 딱지로 굳어진 후 없어지는 듯하더니 옆자리에 다시 또 생겨난다. 끝도 없는 녀석의 죽음과 부활은 <지옥> 시즌2를 생각나게 할 정도다. 분명히 죽었는데 부활자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렇다고 면도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절대 변요한도 차승원도 아니니까. 면도의 방법을 바꿔보았다. 면도기 소독도 철저히 했다. 딱히 큰 효과가 없다. 하다 하다 상남자들이 한다는 클래식 면도까지 도전해 봤다. 바버샵 가면 해준다는 그 거품 면도 말이다.
먼저 따뜻한 물로 세안을 한다. 프리 쉐이브 크림을 듬뿍 발라 수염을 부드럽게 연화시켰다. 프리 쉐이브 크림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서야 처음 알게 됐다. 프리 쉐이브는 면도 전처리 과정으로서 피부 진정과 함께 수염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수염을 불리는 동안 손은 더 바빠진다. 면도 보울에 쉐이빙 비누를 덜어 따뜻한 물을 약간 섞는다. 브러시로 머랭을 치듯 겁나 비비고 휘젓는다. 팔이 떨어질 정도로 돌리다 보면 적당한 밀도의 면도 거품이 만들어진다.
쫀쫀한 거품을 얼굴에 바르고 일자 면도날 새것을 꺼낸다. 정방향, 역방향 아기 다루듯 세심하게 살살 밀어낸다. 5중 날 6중 날 부럽지 않게 깔끔하게 잘 밀렸다. 쉐이빙 거품에서 나오는 남성미 넘치는 향기는 덤이다.
클래식 면도로 바꾸니 모낭염이 현저하게 줄기 시작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역시 이래서 클래식을 근본이라 하는구나. 그런데 반전이 있다. 정확히 5일이 지난 어느 날. 모낭염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클래식 면도로 인해 효과를 보는 듯했는데 심한 절망감이 몰려온다.
안 그래도 클래식 면도의 치명적인 단점을 깨닫고 있던 중이었다. 제대로 하면 모든 과정이 족히 30분은 걸렸다. 아무리 백수라도 면도에 30분이나 투자한다고? 말도 안 된다. 물론 익숙해지면 20분 언더로 단축할 수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면도를 중단하고 알게 된 것
현타가 왔다. 아주 심하게. 면도의 끝판왕 클래식 면도도 먹히지 않는다니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 뒤로 나는 넋이 나간 채로 삼일 정도 면도를 하지 않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아내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란다. '맞아, 면도 못, 아니 안 했어'라고 말하려는데 빵 터져서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면도 못 한 적은 가끔 있었지만 3일이나 못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꽤 덥수룩했다.
민망해진 나는 면도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내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할 의외의 말이 나왔다.
"엄청 지저분하지는 않네. 고생하지 말고 그냥 길러 봐."
충격적인 말이었다. 농담인 줄 알고 나는 재차 물었다. 기르란다. 내가 면도를 조금만 늦게 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내다. 나는 믿기지 않아 삼세 번을 더 물었다. 같은 대답을 얻어내고 나서야 아내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혹시 말을 바꿀까 싶어 나는 얼른 오케이를 외치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지금은 어차피 백수라 출근도 안 하는데 잘됐다 싶었다. 당분간 내 사전에 면도란 없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상상조차 안 했던 일이다. 내가 수염을 기르게 되다니. 초반에는 잘 하는 걸까 걱정도 되고 수염이 있는 내 얼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 공공장소에 갈 때는 마스크를 쓰기도 했다. 이번주 들어서부터 용기를 더 내기 시작했다. 면도 안 한 얼굴을 당당히 오픈하고 다니는 중이다.
아내의 제안이 새삼 고맙다. 모낭염으로 고생하는 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면도 안 하는 삶은 생각보다 만족도가 크다. 물론, 너무 지저분할 때는 살짝 다듬어는 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그래도 매일 얼굴에 칼 안 대는 게 어디인가.
수염 기른 뒤로 거짓말처럼, 모낭염은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는 욕심이 생긴다. 기왕 기르는 거 서양 형님들처럼 털북숭이가 되어 멋진 수염으로 길러내고 싶다. 하지만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영 글렀다. 나의 수염은 숱이 적어 볼까지 뒤덮을 것 같지는 않다.
조금 아쉽지만 이 정도가 어디냐 싶다. 이방이나 간신배 수염처럼 자라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풍성하고 멋진 수염마저도 노력이 아닌 타고나는 재능의 영역이다. 유전자를 탓하며 마음으로 주문을 외친다.
'수염아 수염아 부탁이니 무럭무럭 자라나거라.'
수염 기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매일 손으로 수염을 매만진다. 이게 뭐라고 괜히 설렌다.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는 삶을 향해 가고 있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원하고 만족하는 그런 삶을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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