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발동기일제강점기에 도입되기 시작한 발동기는 대부분 일제가 많지만 국산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발동기가 현재 눈부신 기계 문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오창경
특히 발동기에 시동이 걸리는 순간 연기를 내뿜으며 쿵~쿵쿵쿵 돌아가던 소리는 평생 가슴속에 간직했던 나름의 자율감각쾌락반응(ASMR)소리였다. 나이가 들수록 젊은 날의 기억만큼은 역행하는 모양이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창고 한구석에서 뒹굴고 있던 추억의 발동기를 꺼내서 기름칠하고 부속을 구해 수리를 시작하면서 그의 황혼 인생도 같이 반짝반짝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소를 키웠던 축사를 개조해 개인 수장고를 만들었다. 목수였던 젊은 날을 간직하고 있는 연장과 가설재, 목재 등을 정리해놓고 한쪽에는 추억의 발동기들을 수집해 윤활유를 넣고 기름칠하고 부속품을 갈아서 시동을 걸어보는 재미로 살고 있다.
"내가 강원도 발동기만 못 구했어. 이건 저기 아랫지방에서 구해온 거야. 발동기는 보통 3마력 짜리가 많아. 일제(日製)가 많지만, 국산도 있지."
발동기의 뒷모습만 보고도 어느 회사에서 만든 건지, 어디에서 얼마를 주고 구해온 것인지 그 기계의 역사를 줄줄 읊으며 스토리텔링하는 박대규씨는 90세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해 보였다. 그가 발동기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의 심장은 지금도 작동하는 발동기처럼 뛰었다.
모든 기계에 버튼만 누르면 작동이 되고 리모콘 시대를 지나 음성 인식도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에 들여온 발동기는 우리가 지금 편리하게 사용하는 모든 기계의 기본형이며 모체라고 할 수 있었다.
"발동기가 아니라 애통기여. 기계를 잘 모르면 시동거느라 한나절이 그냥 지나가는겨."
"맞아요. 맞아, 우리 아버지도 그랬슈. 발동이 잘 안 걸린다고 애먼 우리한테 화를 내곤 하셨쥬."
"우리 집안 형님이 들 논에 발동기를 가져다 놓고 발동을 거는데 영 안걸리는겨. 3일을 발동기와 씨름하다가 집에 와서 마루에 벌러덩 누워서 쉬는데 가만히 보니께 한 구석에 부시(부시롯드)가 빠져 있잖여. 그래가지구 그걸 가져다가 끼우고 발동을 거니께 잘 돌아가더란 말이지..."
이게 왜 안 되는겨... 사람들 애 먹이는 '애통기'
당시에는 사람들의 발동기 조작이 서투른 탓도 있었지만, 애초 기계에 들어간 연료의 질도 좋지 않아서 시동이 종종 걸리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박대규씨의 수장고 문을 열고 발동기를 구경하는 사이, 그 앞을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들어와 한 사람씩 발동기가 애를 먹였던 애통기였던 과거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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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 이상 잠들어 있던 발동기를 깨우는 90세 박대규 씨 노동력에 의지했던 농업을 아날로그 기계의 세계로 이끌었던 발동기에 대한 감성을 간직한 90세 어르신 ⓒ 오창경
농사의 신세계를 열어준 발동기라는 신기한 기계를 접하게 되면서 박대규씨는 기계의 구조와 작동 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지간한 기계들은 수리하게 되었다. 새로 나온 기계는 마련해서 사용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여기 있는 것들이 지금도 작동이 되나요?"
"내가 날마다 한 대씩 시동을 걸어보는 재미로 산다니께. 부품을 못 구해서 안 걸리는 것도 있는디, 어지간하면 다 되지."
박대규씨가 박제된 곰처럼 엎드려 있던 발동기 몸체의 어딘가를 만지작거리고 양옆 바퀴의 손잡이를 돌리자 시동이 걸리는 둔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60년 넘게 잠들어 있던 괴물을 깨우는 순간이었다.
무생물적인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발동기의 세계였다. 온몸의 근육과 힘으로 농경 사회를 이끌었던 남자들이 아날로그 세계로 입문하게 된 계기가 발동기였다. 발동기는 그 시절 남자들의 욕망과 로망, 아날로그적 감성의 결정체였다.
"옛날에는 말여, 이 발동기 삯을 받았어. 한 가마니에 한 말씩 삯을 줘야혔어. 벼 모가지가(벼이삭)가 나올 때쯤에는 논에 물이 콸콸 들어가야 하거든. 그때는 서로 논에 물을 대려고 난리가 나는겨. 발동기를 먼저 쓰려고 막걸리도 사주고 그랬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발동기는 한국동란 시기를 지나 1960년대 무렵에 널리 보급되었다. 방앗간에 발동기가 들어가면서 곡물 도정의 역사도 새로 쓰이게 되었다. 연자방아, 물레방아, 디딜방아 등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정미소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