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위) 섬진강 장군목 거북 바위, (오른쪽 위) 섬진강 두무소 풍경, (왼쪽 아래) 용궐산 용굴, (오른쪽 아래) 용궐산 용굴 안쪽 바위 틈새 형상
이완우
용굴 가까이에 용유암지(龍遊庵址)가 있다. 용유암은 용녀가 살았다는 용굴 옆에 있으니, 용녀암(龍女庵)이 더 어울렸겠다. 커다란 암벽을 병풍 삼아서 아늑한 가람 터전이 남아 있다. 암자 터, 석축과 너른 마당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임문수(林文洙, 1802~1883)는 조선 후기 순창 출신의 문관으로 호는 오암(鰲庵)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오수장에서 포목 장사하면서 아들의 공부를 기대하였다. 아버지는 이곳 용유암에서 글 공부하는 아들에게 사흘마다 들렀다. 암자 마루에 쌀자루를 살며시 놓아두고, 아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밤길을 돌아갔다.
어느 비 내리는 날, 아버지는 암자에 들렀으나 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암자의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맞으며 아들이 책 읽는 소리를 기다렸다. 아들은 초저녁에 잠시 잠 들어 있었다. 얼마 후 아들이 방문을 열었을 때 한켠에서 비를 맞고 쪼그리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들은 이날 이후로 굳게 결심하여, 게으름을 물리치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훗날 아들은 대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길에 올랐다. 용유암지에는 용알이 깨어진 듯한 바위가 있었다. 용알이 깨어져야 용이 나올 것이다. '용유암에서 공부하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났고, 과거 공부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암자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고, 고요하다 절터에 단풍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용굴에서 다시 된목으로 올라와 용궐산 정상으로 향했다. 용궐산 정상에 서니 동쪽으로 멀리 하늘 아래 지리산 주능선이 아스라히 보였다. 지리산 주능선의 장엄한 흐름은 언제나 그 품에 안기고 싶은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다. 섬진강이 용궐산을 휘돌아 흐르는 첩첩산중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