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이 소록도 갈 때 들렀던 '무카이집' 이야기

"발꼬락이 또 없어졌다"... 차별의 상징이었던 '무카이 선창', 교황 방문 뒤 사라져

등록 2024.11.11 12:12수정 2024.11.1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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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카이집' 모습으로 '무카이집'이 있었던 인근에서 54년째 조선소를 운영하는 박장길씨가 어릴적 보았던 모습을 회상해 그려 보내준 그림(현재는 집이 사라진 상태). 바다에는 환자들을 태우고 다녔던 '제비호'가 보인다. 환자들을 태운 제비호는 소록도 '제비선창'을 오가며 환자들을 실어날랐다.
'무카이집' 모습으로 '무카이집'이 있었던 인근에서 54년째 조선소를 운영하는 박장길씨가 어릴적 보았던 모습을 회상해 그려 보내준 그림(현재는 집이 사라진 상태). 바다에는 환자들을 태우고 다녔던 '제비호'가 보인다. 환자들을 태운 제비호는 소록도 '제비선창'을 오가며 환자들을 실어날랐다.박장길

전남 고흥 녹동항 금산선착장에서 보성 득량만쪽으로 1㎞쯤 가면 고흥에서 소록도로 이어지는 소록대교가 보인다. 소록대교 녹동쪽 출발지점 바로 아래에는 한센인들의 한 서린 '무카이 선창'이 있었다. '무카이 선창'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이름 지었던 '무카이 집'이 있었다.


일본어 '무카이'와 한국어 '집'이 합쳐져 생긴 단어인 '무카이집'은 일종의 대합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소록도병원을 세웠다. 당시 환자들이 녹동에서 소록도병원을 오가던 배를 기다리던 곳을 '무카이집'이라고 불렀다.

소록도병원 개원 초창기에는 노젓는 배였지만, 후일 엔진을 단 '제비호'로 대체됐다. 환자들을 태운 배가 '무카이' 선창을 떠나 소록도에 도착한 곳은 '제비선창'이었다. '제비선창'이란 환자들을 태우고 소록도를 오간 '제비호'라는 배의 이름에서 연유됐다고 한다.

 소록도를 오가던 환자들이 사용했던 제비선창의 현재 모습. 한센인들의 한서린 현장이다.
소록도를 오가던 환자들이 사용했던 제비선창의 현재 모습. 한센인들의 한서린 현장이다.오문수

'무카이집'에서 '제비선창'까지의 거리는 1.1㎞쯤 떨어져 있다. 보통 제비호를 타고 제비선창에 내린 환자들은 산길을 1㎞쯤 걸어 소록도병원에 도착했다.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일반인과 소록도병원 관리 직원들은 녹동에서 출발해 소록도선착장까지 오가는 선박을 이용했다.

이미 헐려 버리고 없는 집


 '무카이집'에서 소록도 행 '제비호'를 탄 환자들은 '제비선창'에 내려 병원으로 향한다. 지금은 사라진 '제비선창'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있다.
'무카이집'에서 소록도 행 '제비호'를 탄 환자들은 '제비선창'에 내려 병원으로 향한다. 지금은 사라진 '제비선창'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적혀있다.오문수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의 구술 기억 1권>에는 '무카이집'을 이용한 환자의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11살에 발병해 12살에 소록도에 들어온 박 아무개씨의 이야기다.

"동네 사람들이 공동 화장실과 공동 우물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동네 사람들이 '나가라! 나가라! 하자 할아버지가 녹동까지 데리고 와서 뱃삯 50환만 주고는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어요. 그 때 당시에 얼굴이 팅팅 부었어요. 녹동 여그 와가주고 소록도 드나드는 연락선을 탈라 그러니까 선장이라는 사람이 '아가야, 아가야. 너는 이 배타지 말고, 저 물가의 집에 가서 타고 가라.' 그랬어요.


그때가 더운 8월인데, 인자 울면서, 물가의 집이 어디요? 어디요? 묻고 물어 걸어서 녹동 그 선창가에서 거기까지 걸어갔는데 3일을 기다려도 배가 안 오는 거라. 50환 이거이 무슨 돈이라고 밥도 안 사먹고. 아휴! 그곳에는 슬레이트로 지은 얄궂은 집이 하나 있었어요. 3일 동안 굶었어. 그래가지고 물가의 집 옆에 가면은 둠벙이 하나 있었어. 거그서 물을 얼마나 먹었던가, 배가 인자 요만해갖고는…"

 '무카이집' 뒷편에 있었던 둠벙은 현재 메워졌지만 아직도 땅바닥에 물기가 보인다. '무카이집'에서 제비호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이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
'무카이집' 뒷편에 있었던 둠벙은 현재 메워졌지만 아직도 땅바닥에 물기가 보인다. '무카이집'에서 제비호를 기다리던 환자들이 이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오문수

박아무개씨는 일본어인 '무카이집'을 '물가의 집'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3일째 되던 날 소록도에 들어가기 위해 '무카이집'을 찾아온 아저씨가 "아가야, 니는 왜 여그왔냐?"고 묻자 "배 탈라고 여그 왔는데 배가 안 와요" 하고 답했단다. 그러자, 그 분이 뱃삯을 주면서 작은 배를 하나 불러 함께 소록도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국립소록도병원 선착장 모습으로 뒷쪽 부둣가에 소록호가 전시되어 있다.
국립소록도병원 선착장 모습으로 뒷쪽 부둣가에 소록호가 전시되어 있다.오문수

나도 그동안 10여 차례 소록도를 방문해 여러 곳을 돌아봤지만, 이 '제비선창'이 있는 곳은 몰랐다. 하는 수 없어 고흥군 문화해설사 황수연씨의 안내를 받아 '제비선창'과 옛날 일반인하고 소록도병원 관리 직원들만 이용하던 국립소록도병원 소록도선착장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소록도를 오갔던 '소록호'가 부두에 올려져 전시되고 있었다.

또 하나 궁금한 게 있었다. 환자들이 이용했다는 '무카이' 선창 모습과 위치였다. 해서 황수연씨의 안내를 받아, 관련해 자세한 내막을 잘 아는 박장길(79세, 인근에서 54년째 조선소를 운영)씨를 만나 '무카이' 선창 위치와 집을 구경하려 했다. 하지만, 찾아본 결과 집은 이미 헐려 버리고 없는 상태였다.

이후 박장길씨는 "어릴 적에 녹동에서 보았던 '무카이집'을 그림으로 그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일주일 후 그림을 보내주셨다. 다음은 박장길씨의 얘기다.

"당시 '무카이집'은 빨간 벽돌집이었어요. 환자들이 '무카이집'에 도착해 삭쟁이(소나무 가지)를 주워 불을 피우면 제비호가 와서 싣고 소록도로 갔어요.

저 어릴 적에는 무카이 집이 무서워 가까이 못갔죠. 가끔 소록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헤엄쳐 오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떠내려오기도 했어요.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는 부분이 있거든요."

 필자가 서있는 곳이 '무카이집'이 있었던 곳으로 '무카이집'에서 소록도 '제비선창'까지는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필자가 서있는 곳이 '무카이집'이 있었던 곳으로 '무카이집'에서 소록도 '제비선창'까지는 1.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오문수

박장길씨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환자들이 보성역에서 내려 '무카이집'까지 걸어왔다고 그래요.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을 읽어보면 그분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보성역에서 녹동까지는 약 80㎞ 떨어져 있다. 다음은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 일부분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꼬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멸시와 차별의 상징인 제비호와 제비선창이 없어진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소록도 방문이 계기가 됐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소록도가 선정됐다.

1984년 5월 4일, 소록도를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중앙운동장에 모인 환영 인파를 축복한 후 '참다운 화해의 정신'이라는 주제 강론으로 원생들을 위로하였다. 교황의 방문으로 차별의 상징인 '무카이집'과 '제비호', '제비선창'이 없어진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교황의 정신이 남긴 소중한 유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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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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