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근간에 바로 돌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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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시장, 가족이 감당하지 못하는 돌봄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지역 사회 통합 돌봄이 추진되고 있고 관련 법도 통과되었지만 실제로 지역에서 어떻게 이를 정책으로 추진할지 모호한 상황입니다. 지역 사회 통합 돌봄을 위해서는 제도 이외에 비제도적 돌봄이 중요한데 이를 어떻게 활성화할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비제도적 돌봄의 근간이 될 마을 공동체 정책과 사업을 앞장서서 폐기하면서 더욱더 어려운 국면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를 하는 저렴한 외국인 노동력을 수입하는 것은 결코 돌봄의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당장은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돌봄이 저렴해질수록 질은 떨어질 것이고 부정적 효과는 언젠가 우리에게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당장 돌봄이 저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의 부모님(노인)과 아이들에게 다양한 돌봄 시설에서 폭력과 학대의 형태로 되먹임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한 돌봄은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모두, 함께 나누는 것이 핵심입니다.
고령자와 행복한 돌봄
고령자의 행복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 AIP, 지역 사회 계속 거주, 내 집에서 나이 들기 등 다양한 번역어 존재)입니다. AIP의 핵심은 내가 사는 지역과 집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사는 것입니다. 기대 수명에서 건강 수명을 뺀 질병과 장애의 시간을 병원과 요양원에 가지 않고 내가 사는 집에서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병원과 요양원을 가지 않고 내 집에 있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내 집에 있지만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혼자 부실한 식사를 하며 하루 종일 멍하게 있거나 TV를 보는 정도의 단조로운 여가 시간을 보낸다면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존엄하게 살다가 죽는다"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의 간명한 정의는 행복과 돌봄 논의에 중요한 함의를 제공합니다. 내 집에 계속 사는데 그치지 않고 존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다원적 돌봄이 필요합니다. 수시로 지나치며 인사하면서 가끔 반찬을 나누는 이웃, 동네에서 같이 걷기 운동을 하는 또래 친구,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어려움과 건강을 확인하는 행정센터 직원과 마을 간호사, 사실상 주치의 역할을 하는 동네병원 의사와 약사 선생님들,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즐겁게 보낼 복지관과 평생교육센터, 1주일에 몇 번 밥과 술을 먹으러 가는 단골 동네 식당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상 집에서 날 반겨주는 반려동물과 식물들까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동네가 필요하듯 한 어르신을 돌보기 위해 국가-시장-지역 사회를 포괄하고 제도와 비제도를 넘나들며 인간과 비인간이 모두 참여하는 다원적 돌봄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프고 외로움에 사무치는 어느 어르신이 오로지 옆집 이웃만 찾고 또래 친구에게만 연락하고 특정 병원과 약국, 식당을 매일 방문하고 복지관과 평생교육센터 직원을 붙잡고 여러 시간 하소연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과연 당사자가 행복할까요? 이웃, 친구, 의사, 약사, 사장, 직원은 행복할까요? 저는 심지어 반려동물과 식물도 주인이 자신만 바라보면 우울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즉, 돌봄을 주는/받는 존재가 모두 행복해지려면 나눠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