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영화관> 표지
한겨레출판사
극중 곽풀잎은 영화관 매니저다. 풀잎은 영사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아늑한 기분이 좋았다고 고백한다. 어두운 공간에 영상만이 비치는 세계는 그녀가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닿게 했다. 이 감각이 좋아서 오랜 시간 영화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
영화 〈시네마천국〉(1990)의 알프레도처럼 직접 영사기를 돌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영사기 기술도 당대의 기술과 함께 덩달아 발전한다는 점에서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기는 현재 찾아볼 수 없다. 노동력도 노동력이지만 요즘 시대에 굳이 힘들게 영사기를 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사기가 디지털화된 스위치만 켜고 끄는 '스위치 기사'를 한다. 그래도 그것은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이 공간은 그녀를 살게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영사실은 무인 카페처럼 무인화되었고 그때부터 풀잎은 극장에서 손님들에게 음료수와 팝콘을 팔게 된다. 영사기를 담당하는 일은 한때 평판이 좋은 직업이었지만, 이제 풀잎은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에 기대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이 부분은 공상과학적인 바람이지만,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직업도 변한다는, 언뜻 당연한 듯한 사실이다.
각자의 운명, 각자의 삶... 현실을 응시하기
고무섭은 7년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한다. 그에게는 미래에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없다. 굳이 꿈을 찾자면 카페 직원이 아닌 자신만의 카페를 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없을까.
청펀펀 감독의 영화 〈청설〉(2010)을 리메이크한 조선호 감독의 〈청설〉(2024) 속 '용준'과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젊은 청춘임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이 없거나, 찾지 못한다.
여름의 경우는 자신만 빼고 가족 모두 청각장애인이라는 점에서 미안한 마음이 컸기에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이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라는 판단해 자신을 숨겼다고 하더라도, 용준은 왜 찾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것은 질문이 될 수 없다. 방황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젊은이만의 특권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방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방황'이 문제 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삶이 부정되어야 할 것도 아니겠다.
이시대가 요구하고 원하는 특정한 '시기'나 적절한 '때'에 꼭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시기'나 '때'에 매달리다 보면 자신의 삶을 찾기보다는 누군가의 삶에 의탁해 의지하게 된다. 우리에겐 각자 자신의 삶과 운명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