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하고 싶었지만책 표지
빨간소금
장애아이 엄마로서의 삶
여기 한 여자가 있다. 1950년 생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난 이순희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당찼던 그녀가 제 나이 스물다섯부터 십 수 년 간 쓴 일기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제목은 <통곡하고 싶었지만>. 무엇이 특별하여 한 여자의 일기를 책으로 펴낼 정도가 되었을까.
처음엔 육아일기였고, 나중엔 벅찬 삶 가운데 저를 다잡는 수단으로 제 역할을 한 글 모음집이다.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 살며 낳은 둘째아들이 뇌성마비 진단을 받으며 일기는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다. 그로부터 이어진 삶의 궤적은 우리 중 누군가는 맞닥뜨릴 밖에 없는 장애아이 엄마로서의 삶이다.
스물다섯부터 마흔여덟까지,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이십대 주부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여인이 되기까지 짧고 긴 수백 편의 일기가 연대기순으로 이어 붙었다. 예정일보다 일찍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뇌성마비아라는 진단을 받고, 하나부터 열까지 그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대면하며 느낀 소회가 투박한 문장 가운데 들어차 있다.
형수의 장애는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한테도 말할 데가 없었다. (중략) 혹시나 '엄마 탓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남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든, 하고 싶은 말이 많든 적든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34p
아들 김형수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뇌성마비 중에선 경증이라고 하지만, 신경근육계가 제 말을 듣지 않는 심각한 장애다. 가만히 두면 근육이 굳고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 엄마된 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러나 누구에게도 속 깊은 이야기를 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자료를 찾아보거나 다른 이들의 조언을 들을 만한 환경도 되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낼 뿐이었다.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남편과 무신경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홀로 아이들을 책임지는 이순희의 힘겨움이 묻어난다. 저도 잘 모르는 병을 진단받은 뒤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마주한 곤란한 상황들,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겪었던 어려움, 장애에 무지하고 알려 하지도 않는 사회의 면모를 솔직한 마음 그대로 하나하나 적어나간다. 장애가 없는 첫째아들과 장애를 가진 둘째 사이에서 온 정신을 둘째에게 쏟는 일의 문제를 자각하기도 하고, 불편한 근육을 쓰지 않으려는 둘째에게 어떻게든 그를 쓰도록 이끄는 현명한 방법을 고민하기도 한다.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서 삶을 긍정하고 도전하려는 자세를 지켜나가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기질적으로 당찬 성향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겠으나, 매순간 글로써 스스로를 다잡으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겠단 각오를 되새긴 습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보아야 옳을 테다.
책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이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는 또래에 대한 갈증이다. 형수에게도, 또 글을 쓴 이순희 자신에게도 타인과의 관계가 절실했다. 이를 일부나마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건 뇌성마비복지회였다.
아침 9시에 아이들을 태우고 가서 오후 5시에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돌봄 서비스를 1980년 이전부터 이 단체가 자구책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명 가량의 아이를 그중 두 어머니가 당번처럼 돌아가며 돌본다. 그렇게 하면 주1회 꼴로 일이 돌아가니 엄마가 제 삶을 꾸려가는 데도 좋고, 아이에게도 다른 아이와의 관계가 생기니 좋다는 것이다.
특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부모란 대개 과잉보호를 하게 마련이 아닌가. 하나부터 열까지 손을 내밀다 홀로 해낼 수 있는 일조차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해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다 같이 뇌성마비를 지닌 아이들을 키우던 엄마들이 공동으로 육아의 일부를 맡는 덕분에 부모에게도 숨 돌릴 여유가 주어진다.
대다수 엄마의 생각은 어떠한가. 불안과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안절부절못하고'의 잘못)은 물론 매시간 전화하고 며칠은 아이와 함께 왔다. 저런 태도라면 아이의 홀로서기가 얼마나 가능할까. 언젠가는 반드시 엄마의 손길이 없어질 텐데 그때는 어쩌려는가. (중략) 모든 행동을 아이의 의지에 의존하는 태도가 제일 중요하다. 복민이는 간식을 먹여 주지 않으면 뒹굴어서라도 입으로 빨아먹으려고 했다. 뒹굴지도 못하는 영준이는 "워, 워" 괴성을 질렀고, 그러면 배밀이를 잘하는 내 아들 형수가 겨우겨우 집어 먹여 주었다. 형수는 집는 동작을 익히고 영준이는 의사전달 의지가 생긴다. 이렇게 서로 살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74, 75p
장애를 가진 이와 그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멀찍이 떨어져 보아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작은 문턱 하나가 휠체어 탄 이에겐 다다를 수 없는 세상을 만들 듯, 섬세한 고민 없이 설계한 건물이 어떤 장애인에겐 불편하기만 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매끄러운 돌바닥이 고급스러운 종합쇼핑몰도 누군가에겐 그와 같은 어려움을 야기한다.
"엄마, 우리는 왜 사람 없는 데만 골라서 놀러 가노?" 이렇게 묻기까지 아이들은 얼마나 망설였을까. (중략) 지하상가는 미끄러운 돌바닥이라 목발을 옮겨 걸으려면 얼음판을 걷는 것만큼이나 위험과 어려움이 따랐다. (중략) 형수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온몸에 힘을 주느라 땀범벅이었다. -137~139p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편견만이 보인다
책에 추천의 글을 단 둘째 아들 김형수는 이 책에 대하여 '장애인 부모의 육아일기로 읽히길 거부한다'며 '역사와 사회와 타인이 감추고 숨기고 침묵하기를 요구했던 바로 그 목소리이자 고통이다'라고 강변한다. 책이 과연 그 만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지 공감하긴 쉽지 않으나, 한국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해 묵인하기를 요구해온 많은 어려움이 독자 앞에 솔직히 드러난단 점은 유의미하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보다 쉽게 정보를 찾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과 교류할 수 있는 세상이다. 책이 적고 있는, 이순희가 마주한 여러 어려움 가운데 상당수는 그로써 일부나마 개선되었다 해도 좋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얼마나 나아졌는가. 장애인에 대한 직접 지원은 물론이고, 그 필요에 대응하는 현실적 대책도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다. 장애인은 보통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점점 들어가고 미디어 또한 그들의 삶을 충실히 조명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장애에 대한 이해가 소실되고, 지하철 역에서 드러눕는 과격한 모양으로만 비춰지곤 하는 것이다.
책에서도 마찬가지. 책 가운데 어디서도 국가의 역할이 제대로 비춰지지 않는다. 어린 김형수가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으로 세상에 역할을 하기까지 국가며 사회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주어진 수많은 자극 가운데 한국이 과연 선진국이라 웃으며 이야기할 요소가 얼마나 되는가. 부끄러워 질 밖에 없는 일이다.
<통곡하고 싶었지만>은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워낸 어느 어머니의 솔직한 기록이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버틴 끝에 만족할 수 있는 삶에 도달했다. 첫째는 대기업에 입사했고, 이 책이 나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둘째 아들 김형수는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를 설립한 활동가이자 인권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이순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그녀가 걸었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기에 그 성취가 더욱 빛난다. 그래서 <통곡하고 싶었지만>은 장애아를 키운 어느 어머니가 역경에 굴하지 않고 이겨낸 성취담이 된다.
통곡하고 싶었지만 - 50년생 이순희의 육아 일기
이순희 (지은이),
빨간소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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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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