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걸장군 전승비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전승비로 왜구들은 청자의 도료를 얻기 위해 쳐들어 온 것으로 보고있다.
정윤섭
염걸 장군은 적선이 구강포에 쳐들어오자 수백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있다가 유인된 적 수 천명을 소탕하였다고 한다.
왜군이 강진만을 경유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도자기의 도료를 확보하기 위해 청자 산지로 유명한 이곳에 쳐들어 온 것이다.
정수사는 청자 전성기에 강진 고려청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찰이다. 도공들은 작품을 구상하거나 가마에 불을 지필 때면 이곳에 찾아와 기도하고 참선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도공들이 정신적 수양을 갈고 닦아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신비의 고려청자를 만들 수 있도록 기도를 올리던 정신적 귀의처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 10대 축제에 오른 강진청자축제가 시작되면 맨 먼저 이곳에서 당시 도공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이들의 혼이 오늘날 강진 청자의 맥을 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명 도공에 대한 추모제가 열리면 한평생 도공의 삶을 살다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천혼문이 읊어진다.
정수사는 천년 역사를 잇게 한 고려 도공들의 참선과 정신적 귀의처 역할이 되어 준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강진의 고려청자
강진은 고려청자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그 고려청자가 생산되었던 곳이 대구면 일대다. 대구면 일대는 12, 13세기 무렵 고려청자가 최고의 기술로 절정을 이루며 생산되던 곳이다. 고려는 당시 중국 다음으로 첨단 제품인 최고의 청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싣고 갔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까지 수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