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만은 구하게 해주십시오"

조선족 사형수 전재천을 기억하십니까

등록 2001.08.21 05:58수정 2001.08.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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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잔혹한 선상폭력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비록 언어가 통하는 동포이긴 하지만, 오랜 중국 생활로 인한 문화적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비극적인 사건의 책임을 또 다른 피해자인 그들에게만 묻는다면, 한국사회는 선상폭력을 근절하지 못한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는 비난과 아울러 과거 일제의 핍박을 피해 중국으로 떠나야 했던 중국 조선족들에게 조국으로서의 넓은 포용력과 책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의에 기초한 법의 심판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어야 하겠지만, 한국사회가 참회의 나날을 살고 있는 사형수 전재천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무엇보다 한 많은 중국동포들을 보듬고 한민족 공동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바램에 부응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조선족 동포 전재천 탄원취지(2001. 7)>


이미 오래 전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참혹한 비극이 하나 있다. 96년 여름 한국 사회를 온통 슬픔과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던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

<페스카마호 사건>은 돈을 벌기 위해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호를 탄 중국 조선족 선원 6명이 96년 8월 남태평양 한가운데서 선상 반란을 일으켜 선장을 비롯한 한국인 선원 7명 등 모두 11명의 선원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선장과 한국인 선원들의 끊임없는 하선 협박과 폭행, 인간 이하의 취급에 항의해 이와 같은 사건을 저지르고 일본으로의 밀항을 시도하다 살아남은 선원들의 '반란 제압'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당시 살인사건을 일으킨 중국 조선족 동포 6명은 같은 해 12월 1심에서 전원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다음해 4월 2심에서 1명은 사형, 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그해 7월 법원의 상고심 기각으로 형이 확정돼 사형수와 무기수로 나뉘어져 전국 각지의 교도소로 흩어져 수감되어 있다.

이들 6명 중 '반란의 주범'으로 지목돼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조선족 동포 전재천(48) 씨. 그는 현재 부산주례구치소에서 자신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를 뉘우치며 하루하루 형 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목숨만은 살리자... 5년간 탄원 이어져

그러나 이미 형이 확정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씨의 구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는 끊이지 않고 있다. 96년 사건 발생 이후 5년 동안 전씨의 가족은 물론 전씨가 거주하던 중국 길림성의 교원들, 기독교회, 연변대 교수, 조선족 노인연합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부의 선처를 요구하며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페스카마호 사건> 이후 관련 조선족 동포들의 문제에 줄곧 관심을 기울이며 전씨의 구명 운동을 벌여온 <부산 외국인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이하 외국인 인권모임, 대표 정귀순) 역시 지난 7월 "사형수 전재천의 목숨만은 살리자"며 다시 <탄원서>를 제출했다.

11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혹한 사건의 범인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전재천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는 것은 <페스카마호 사건>의 원인이 '고질적인 선상폭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족 선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폭력은 <페스카마호 사건>이 일어난 가장 직접적인 이유다.

한국 동포들이 자신의 구명운동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은 전씨가 사형이 확정된 지난 97년 5월 외국인 인권모임 정귀순 대표에게 처음 보낸 편지에는 '참혹한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전씨는 당시의 편지를 통해 대학까지 나온 교사였던 자신이 배를 타게 된 배경과 폭력이 난무하던 선상에서의 참혹한 생활, 자신의 참회를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가난에 밀려 교사에서 선원으로 나선 조선족

보통 다른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전씨의 부모님 역시 일제의 수탈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 동포다. 전씨는 당시 편지에서 자신의 부모님이 고향인 경남 합천을 떠나 중국에 정착해 고생했던 일들부터 자세히 써 나갔다.

"...잃어버린 자유, 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인생의 고달픔과 눈물이 젖어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님은 1940년 일제의 침략으로 제 조국을 잃고 생존을 위하여 경남 합천 고향을 이별하고 중국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낯설고 땅설은 타향에서 치욕과 구속을 받아가며 고생하여 오시다 아버지는 1966년 세상을 뜨셨습니다. 39세에 홀로된 어머님은 우리 3남2매를 키우며 아득한 세월을 눈물로 헤쳐가며 손발이 터지고 등이 굽도록 고생하여 오시며 우리 형제들을 모두 공부시켜 출세를 시켜주셨으며..."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남으로서 역할을 해왔던 전씨는 자식들이 점점 커가면서 교육비의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큰딸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인 96년 6월 원양어선을 탈 것을 결심했다.

"...하지만 내 자식이 점점 더 커가며 학교의 학자금이 큰 부담이었어요. 나는 자식들 모르게 시장에 나가서 채소도 팔고 주일이면 ○○로도 조금씩 돈을 벌어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올해 7월이면 대학에 가야하는데 엄청난 금액이 수요됩니다. 생각 끝에 승선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가난했던 살림살이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내가 승선하지 않았던들 가족이나 나에겐 이런 고통, 괴로움도 없이 행복했을 걸..."

그러나 가난을 벗기 위해 원양어선에 선원으로 취직한 전씨는 열심히 일했지만, 한국인 선원들의 멸시와 폭행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편지에서 전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를 그토록 무시하였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한국인의 개'라고 놀려댔으며... 우리 조선족은... 한국인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좀 나을까 바라며 기다려 왔건만 폭행은 하루하루가 더욱 심해졌고... 한국인은 우리보고 "너거들은 죽으면 참치 두 마리값보다 헐해"라 하며, 생사에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욕과 매를 맞아 양 귀가 먹고, 이빨이 부러지고, 머리가 터져도 송사할 곳이 없었습니다...

"너거들은 죽으면 참치 두 마리값보다 헐해"

이처럼 힘든 생활을 견디던 전씨와 동료들은 급기야 가장 절박한 상황까지 몰리게 됐다. 전씨 등 일행이 뱃일에 익숙치 못해 조업에 차질이 생기자 선장은 조선족 선원의 하선을 결정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던 것이다.

"...승선 50일만에 나는 방광결석으로 인하여 하선하겠다고 보고전을 적어 올렸습니다. 허나 선장은 우리에게 작업손실비와 왕복항공비를 책임지라고 하였습니다... 몇 대를 벌어도 벌 수 없는 돈입니다... 제일 참기 힘든 것은 선장은... '선상반란분자'의 죄명을 씌워 미국령 사모아 경찰서에 3개월 이상 구속시킬 것이라고... 염치를 불구하고 가족을 위하여 선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무용이었습니다..."

선장의 징계와 하선 결정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절망감을 품은 이들은 결국 참혹한 살인극을 저지르고 '흉악범'이 되어 한국의 차가운 철창 안에 갇히게 됐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전씨는 구치소에서 종교에 귀의하고 날마다 참회의 기도를 하며 유가족들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 지난 99년 전씨가 유가족들에게 쓴 편지 내용에는 지난날을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다음과 같이 담겨 있다.

"...오늘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유가족님께 감히 글월을 올리게 됨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곳에서 3년여간 사형수로 하루하루 시한부 삶을 살아온 저의 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들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종교에 임하여 모든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보속하고 있습니다. 고인께도 명복을 빌고 유가족님을 위해서도 하루에 수 차례씩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도 얼마나 죄스럽고 미안한지 모릅니다... 내 아픔, 내 슬픔, 내 괴로움, 내 그리움이 어찌 유가족님의 아픔에 비교가 되겠습니까..."전재천 씨의 편지 <유가족님께 올립니다>(1999.6.20)

또 3남매가 아버지를 잃지 않기를

전씨가 감옥에 갇힌 후 전씨의 가족들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전씨의 노모와 아내, 두 딸과 아들은 지금도 전씨를 믿으며 유가족들과 한국인들의 선처로 '사형'이라도 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 만약 여러분들이 너른 가슴으로 이 세상에 또 3남매가 아버지를 잃는 불행하고 참혹한 비극이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그리고 제2의 <페>, 제3의 <페> 사건 같은 민족의 비극이 벌어지는 것을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 미연에 방지하시려는 착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속죄할 기회와 일루의 삶의 기회를 주신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큰딸 전여혜 - 피해자 가족에게 드리는 편지)

덧붙이는 글 | 탄원서

지독한 가뭄에 대지와 농부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터는 선한 마음이 있는 한 이 땅은 아직도 인간이 살만한 곳이라 믿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지 오래지만, 1996년 여름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오늘도 문이 열릴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형수의 삶을 살고 있는 중국동포 전재천은 부산 주례 구치소에서 길고 긴 참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수형생활 동안 자신을 돌보아 준 수많은 한국 분들의 따뜻한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며, 이 같은 한국의 참모습을 페스카마호 선상에서 알았다면, 어찌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그의 안타까움에 저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날 일제의 핍박과 가난을 면하고자 멀리 만주벌판으로 떠나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의 분단으로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중국동포들은 중국에서도 언어와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존심 강한 소수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민족으로 중국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고 중국사회의 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점 점 더 어려워진 중국동포사회에 한중 수교 이후 조국의 발전한 모습은 이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형수 전재천은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에 정착한 갔던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숱한 어려움에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훌륭하게 공부시키고, 아내와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훌륭히 잘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그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칠순 노모의 병원비, 두 딸의 교육비, 아들아이의 교통사고로 이어진 불행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한국어선에 승선한 것이 그의 고생을 덜어주기는 커녕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고 이제 영영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형수의 신세가 되리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페스카마호 선상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은 우리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는 고질적인 선상폭력의 극단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인 선원을 대신해 들어온 외국인선원들에 대한 무인권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약 없이 감옥에 갇혀있는 사형수 전재천을 비롯한 5명의 무기수 역시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올 1월 남태평양 참치잡이 어선에서 한국인 선원의 폭행을 피하려던 중국동포 선원 한 명이 한국인 선원의 다리를 찔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 페스카마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한민족으로서의 진지한 애정과 아픔을 보듬는 그 무엇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부 한국인들의 중국동포에 대한 사기행각으로 순박하고 정겹던 중국의 조선족사회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원이나 공장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간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받았던 천대와 멸시, 부당한 대우 등은 이들의 가슴에 한과 분노를 심어주어, 한국은 이제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조국이기 보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나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무기수로 감형이 된다면 그는 새롭게 태어나 진실로 참회의 길을 걸을 것임을 믿습니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큰 변화의 의 큰 걸음을 내디딘 이 시점에, 그리고 한중수교 10년을 바라보며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까지 보듬고 나아가려는 큰 의지의 표현으로 그에게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진실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부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1년 7월

덧붙이는 글 탄원서

지독한 가뭄에 대지와 농부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터는 선한 마음이 있는 한 이 땅은 아직도 인간이 살만한 곳이라 믿습니다.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지 오래지만, 1996년 여름 페스카마호 선상반란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오늘도 문이 열릴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형수의 삶을 살고 있는 중국동포 전재천은 부산 주례 구치소에서 길고 긴 참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수형생활 동안 자신을 돌보아 준 수많은 한국 분들의 따뜻한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오늘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며, 이 같은 한국의 참모습을 페스카마호 선상에서 알았다면, 어찌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겠느냐는 그의 안타까움에 저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지난 날 일제의 핍박과 가난을 면하고자 멀리 만주벌판으로 떠나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의 분단으로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중국동포들은 중국에서도 언어와 풍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존심 강한 소수민족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민족으로 중국사회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고 중국사회의 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점 점 더 어려워진 중국동포사회에 한중 수교 이후 조국의 발전한 모습은 이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형수 전재천은 만주로 건너가 중국 길림성에 정착한 갔던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숱한 어려움에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훌륭하게 공부시키고, 아내와 세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훌륭히 잘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그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칠순 노모의 병원비, 두 딸의 교육비, 아들아이의 교통사고로 이어진 불행으로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한국어선에 승선한 것이 그의 고생을 덜어주기는 커녕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고 이제 영영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형수의 신세가 되리라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페스카마호 선상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들은 우리 모두 익히 잘 알고 있는 고질적인 선상폭력의 극단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며,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인 선원을 대신해 들어온 외국인선원들에 대한 무인권의 단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약 없이 감옥에 갇혀있는 사형수 전재천을 비롯한 5명의 무기수 역시 피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올 1월 남태평양 참치잡이 어선에서 한국인 선원의 폭행을 피하려던 중국동포 선원 한 명이 한국인 선원의 다리를 찔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 페스카마호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한민족으로서의 진지한 애정과 아픔을 보듬는 그 무엇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부 한국인들의 중국동포에 대한 사기행각으로 순박하고 정겹던 중국의 조선족사회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원이나 공장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간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받았던 천대와 멸시, 부당한 대우 등은 이들의 가슴에 한과 분노를 심어주어, 한국은 이제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조국이기 보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나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무기수로 감형이 된다면 그는 새롭게 태어나 진실로 참회의 길을 걸을 것임을 믿습니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큰 변화의 의 큰 걸음을 내디딘 이 시점에, 그리고 한중수교 10년을 바라보며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의 고통과 아픔까지 보듬고 나아가려는 큰 의지의 표현으로 그에게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진실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과 기회를 부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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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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