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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온도> 표지 2023년 1월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출간된 <관계의 온도>. 아홉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관계의 온도> 표지2023년 1월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출간된 <관계의 온도>. 아홉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 도서출판 아시아

2012년 중국에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중국의 대문호 모옌은 고향에 관해 이렇게 언급한다. "작가의 고향은 단지 부모의 나라만이 아니라 그가 어린 시절 내지는 젊은 시절에 살았던 곳을 가리킨다." 그곳엔 어머니가 당신을 낳을 때 흘린 핏자국이 있고 당신 조상이 묻혀있기에, 고향은 당신의 '피가 흐르는 땅'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자면 글을 쓰는 나의 고향은 '전라도'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인의 피가 흐르는 땅, 그곳의 가장 아픈 사건은 '여순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무수한 피가 흘러넘치고, 희생자의 뼈가 묻힌 땅. 그 전라도에서 나고 자라 쓴 글은 그곳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 출간한 소설집 <관계의 온도>(아시아, 2023)은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됐다. 이 소설집에서 핵심 작품을 꼽자면, 단연 <돌의 노래>와 <세도나>이다. 바로 여순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후일담을 담은 단편이다. 여순사건을 담은 <돌의 노래>를 먼저 보겠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순사건은 이러한 선언문을 내걸고 봉기한다. 여순사건의 시작은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려는 국가에 대항해 봉기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은 여순사건의 재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여덟 살 순덕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순덕은 여순사건에서 엄마인 '순천댁'을 잃고, 엄마가 준 여수의 돌을 손에 쥐고 미국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작가인 나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도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간접 체험을 했던 사람도 아니다. 이러한 나에게 여순사건에 관한 소설을 쓰기된 계기가 있다. 지난 여름에 여수를 방문하면서였다. 그때 나는 가족들과 여수의 한 해수욕장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을 했다.

바다의 모래는 검은색이었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비는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여순사건 형제묘'였다. 나는 차를 멈추고 내려서 '여순사건 형제묘'가 왜 형제묘인가를 알게 되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에 갔을 때, 그 앞에 놓인 돌에 쓰인 글씨를 보았다.

그때 나는 여순사건, 곧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을 떠올렸다. 그들이 죽어간 자리에 서자 내가 작가로서 알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여수에 있는 후손도 여순사건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여수 밖의 사람들도 '여순사건'과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모른다.

누군가는 화를 내고 알려야 하며, 그것이 작가인 내가 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 여수에서 돌아온 후에는 미국에 갔고, 미국 시애틀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부역자로 호명되었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여순사건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화를 내며 쓰게 된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집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세도나>이다. 나는 이 단편 소설을 2018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설과 영화가 많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관해서 언급하기 위해, 몇 번을 다시 쓰게 되었다.

기사를 찾아보고 주제를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여성 피해자'로 잡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실제 피해자가 어딘가 남아 있는 이야기를 쓸 때는 신중함이 관건이라고 본다. 특히, '과시적 성폭력'의 실제 피해자가 남아 있는 경우, 신중함의 무게는 저울로 잴 수 없다.

이 소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은 화자가 인디언이 항쟁했던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에서 광주 사건의 가해자와 마주치는 사건이 담겨 있다.

내가 광주의 문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 가족이 광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 집회를 하다가 잡혀가 고문을 당했던 은사님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옌이 말했던 '피가 흐르는 땅'의 후손이 나이다. 이 소설을 쓴 나의 실제 경험은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갔다가, 그곳에서 광주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사건이다. 논쟁의 대상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갔던 사람이었다. 그들은 광주 문제에 간첩설을 강하게 주장했다.

큰 논쟁이 있었고, 작가인 나는 광주의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로 여겨졌다. 이 소설을 퇴고하던 지난해에 나와 논쟁했던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나와 논쟁을 하고 1년 후 그 사람은 죽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창작과정과 퇴고 과정에서 얽힌 이러한 사연은, 내가 살아 온 고향에 더욱 천착하게 했다.

여수와 광주. 반복되는 국가의 폭력과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언급되어야 할 이야기라고 본다. 특히, 그 피를 이어받은 자리에서 태어난 작가라면 멈추지 않고 새로운 시선으로 희생자의 이야기를 복원해 알려야 한다고 본다.

관계의 온도

박지음 (지은이), 도서출판 아시아(2023)


#광주518#여순사건#소설집#돌의노래#세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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