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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유배인들의 비석이 있다.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유배인들의 비석이 있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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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의 상소는 다시 한 번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상소의 말미에서 "신의 말이 그렇지 아니할진대 이 도끼로 신을 베어 금수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옳은 귀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비장한 각오를 적시하였다. 이 무렵 또 다른 이들의 상소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화서학파 동문 후배도 서울에 올라와 면암과 별도로 7항 반대 상소를 올렸다. 곧 유인석·홍재구·유중악 등 경기·강원도에 거주하던,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 문인 47명이 연명으로 개항을 반대하는 <절화소(絶和疏)>를 올렸다. 면암의 '지부상소'와 중암·성재 문인들의 <절화소>는 동일한 시대상황에서 학문적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전자는 출사(出仕) 처지에서 후자는 순수 재야의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서문파는 곧 전력을 투입하여 개항에 철저하게 반대했던 셈이다. (주석 1)

면암은 1876년 1월 22일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긴 내용이어서 여기 서는 연구자가 압축한 것을 싣는다.

한 연구자는 면암의 <지부상소>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왜구가 우리의 무방비상태의 약점을 알고 강화를 요청하는데, 이에 응하는 것은 고식적인 방책이다.
둘째, 왜구의 상품은 음사기완(淫奢奇玩)의 사치품인데 우리의 물화는 민명소기(民命所奇)의 필수품이다. 만일 그들과 교역한다면 백 년 안에 우리나라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셋째, 일본을 왜라고 하지만 실제는 양적과 같으므로 그들과 강화하면 사학(邪學) 즉 천주교가 전국에 만연될 것이다. 
넷째, 그들과 강화하면 조선과 왕래하며 살게 되고 그들은 짐승과 같은지라 재산이나 부녀자를 약탈하게 되어 혼란하게 되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청나라와 강화하는 것은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이긴 하지만 중원을 지배해 온 이래로 중국의 인의를 배워, 사람이 되고자 하였으므로 도리를 묻지 않고 이소사대(以小事大)로 교호(交好)를 하였으나 왜국은 화색(貨色)만을 즐기고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짐승인지라 짐승과는 절대로 교호할 수 없는 일이다. (주석 2)

이번에도 조정 내외의 상황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대신과 승지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나 같이 상소에 대한 비난과 엄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홍문관에서는 연명으로 국청을 열어 죄인을 난적으로 다스리라고 소리쳤다. 이에 앞서 고종이 '물꼬'를 텄다. 

왜적을 제어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왜적을 제어하는 일이요. 양이(洋夷)를 배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이를 배척하는 일이다. 이번에 왜신(倭臣)이 온 것이 어떻게 양이와 합동하였다고 정확히 알겠는가. 가령 왜가 양이의 앞잡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각자 사변에 대응할 방도가 있다. 

그런데 최익현의 상소는 갑자기 내가 사교를 물리치기를 엄중히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 주창하여 온 세상을 미혹하려는 계책으로 이렇게 군부를 모함하는 말을 만들어 내어 방자하게 지척하고, 지척하고도 부족하여 위협까지 하고, 위협하고서도 부족하여 꾸짖기까지 하였다. 그 안에 두 세 구절의 말은 이것이 어찌 오늘날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주석 3)
 영당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있다.
 영당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있다.
ⓒ 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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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지도자)가 군주답지 못하면서 대접받기를 바라는 심보는 예나 이제나 다르지 않다. 국가 안위, 민족 만대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문제에 관해 생명을 내걸고 비판하는 충심을 반역지심으로 몬 것이다. 그리고 허리에 꿰찬 상징적인 도끼를 '위협'으로 몰았다.

면암은 개항반대 상소를 올린 다음날 어명으로 의금부 감옥에 투옥되었다. 두 번째 옥사였다. 그리고 1월 25일 전라도 흑산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이 내렸다. 지난 번의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 유배형이었다.

서울에서 660리 떨어진 외진 섬이었다. 지금의 전남 무안의 포구에서 배를 타고 6일간의 항해 끝에 2월 16일 소흑산도에 도착, 문안주라는 사람의 집에 위리안치 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 유배형을 받았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명저 <자산어보>를 남기고 현지에서 숨졌다. 다산은 흑산도와 관련 글을 남겼다. 

그는 흑산도(黑山島)라는 이름이 하도 끔찍해 자산(玆山)으로 바꿔 불렀다.

"흑산이라는 이름이 듣기만 해도 끔찍하여 내가 차마 그렇게 부르지 못 하고 편지를 쓸 때마다 '현산'으로 고쳐 썼는데, 현(絃)이라는 글자는 검다는 뜻이다"라고 다산은 설명해놓았다.

'검을 흑'과 '검을 현'은 뜻이야 같지만 어감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무섭고 두려운 흑(黑) 자를 대신하여 유순하고 평이한 '검을 현'이라는 글자를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호칭하기를 정약전은 정약용을 '다산(茶山)'이라 부르고 정약용은 형님을 '현산'이라고 하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 때문에 오늘날 <자산어보(玆山魚譜)>라고 불리는 정약전의 저서 이름도 마땅히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 (주석 4)

조선왕조에서 흑산도 유배자는 많지 않았다. 뱃길이 험하여 항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면암은 전남 무안에서 배를 타고 6일간 항해 끝에 소흑산도에 도착하였다. 

면암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기간은 햇수로 만 3년이었다. 1876년 2월 유배지에 도착한 뒤 1879년 2월 귀양살이에서 풀려날 때까지 면암은 소흑산도와 대흑산도를 내왕하면서 지냈다. 그가 먼저 배소를 정한 곳은 소흑산도였다. 이어 이듬해 4월 대흑산도에 들어가 40일간 체류한 뒤 다시 소흑산도로 돌아왔다. 같은 해 7월에 면암은 다시 대흑산도로 이거하며 그곳에서 1879년 2월 석방될 때까지 생활하였다. 결국 흑산도에 머문 3년 간 면암은 소흑산도와 대흑산도에서 각기 1년 반 동안 지낸 셈이었다. (주석 5)
  

주석
1> 박민영, 앞의 책, 71~72쪽.
2> 김길환, <한말 전후의 유학사상>, <한국 사상의 심층연구>, 258~259쪽, 우석, 1982.
3> 박민영, 앞의 책, 74쪽.
4> 박석무, <다산 정약용평전>, 445쪽, 민음사, 2014.
5> 박민영, 앞의 책, 75~7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최익현평전,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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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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