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은 청년 정치인, 현직은 동네 파스타 식당 주방보조가 현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눈살 찌푸리는 정쟁 속에서도 우리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선의에 기대는 정치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기자말] |
[기사 수정 : 23일 오후 5시 6분]
69만4000원.
식당 주방 일을 시작하고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오랜만에 4대 보험 적용 직장을 다닌다는 일종의 안정감이었다. 첫 월급을 받고 얼마 뒤, 국민연금 안내를 메일로 받았다.
앞으로 "만 60세까지 356개월을 납부하면 예상 연금월액은 매월 69만4000원"이라는 친절한 공지였다. "소득이 오르면 예상연금월액이 올라가고, 소득이 줄거나 납부를 중단하면 예상연금월액은 줄어듭니다"라는 국민연금의 원리 역시 투명하게 안내받았다. 비록 5인 미만 사업장이지만 최저임금보다 많이 받고 노동조건이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막상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듣고 나니 조금 씁쓸해졌다.
하필이면 이 안내를 받은 당일에 어느 퇴직한 교수님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 자리에서 교수님의 연금 수령액을 알게 됐다. 누군가 연금을 얼마나 받는지 질문하자, 교수님은 이렇게 답했다.
"한 400만 원 조금 넘게 받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먹고 사는 수준이죠."
상대적 박탈감이 이런 건가 싶었다. 국민연금보다 사학연금이 더 빨리 소진된다던데 이래도 되나. 대강 계산해 보니 소득은 교수 평균과 4배 차이가 나는데, 연금은 6배 차이가 난다. 이 정도면 소득격차가 문제가 아니라, 정작 노후보장시스템 안에서 더 불평등해진 것 아닌가? 누가 연금이 사회연대 정신을 구현한다고 했나.
국민연금은 성공한 제도인가
나는 1990년생이다. 만 65세가 되어 연금을 수령하는 시점인 2055년에 딱 국민연금 적립 기금이 고갈된다고 한다. 69만4000원도 못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치에 참여하기 전에 국민연금은 관심 밖 문제였다. 몇몇 직장에서 일할 때마다 사장이 4대 보험 가입 여부를 물어보면 거부하기도 했다. 어차피 고갈돼서 못 받는다고 하기도 하고, 지금 당장 급한 급여가 줄어드는 것이 더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다. 국민연금은 '덜 내고 더 받는' 수익률이 아주 높은 노후 투자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금 고갈이 아니다. 국민연금이 '투자'라는 인식이다. 오랫동안 많이 낼수록 나중에 더 많이 받는 기본 시스템은 '노후 준비 재테크'로서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기도 하다.
실제 국민연금의 작동 원리와 취지가 현시점 노동자가 내는 돈으로 현재의 노인세대를 부양하는 원리라고 해도 눈에 보이진 않는다. 국민연금 납부를 위한 가장 빠른 설명은 "지금 매월 월급의 4.5%만 내면(나머지 4.5%는 기업이), 만 65세 이후에는 월마다 40%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덜 내고 더 받는 시스템이라는 유인에 사회연대 정신은 없다.
이미 다수의 시민들은 국민연금을 자신의 노후를 위한 투자처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연기금을 사회적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에 크게 분노할 이유가 없다. 연기금은 우리 사회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함께 마련한 재원이 아니라, 전 국민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모아둔 이율 높은 상품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론 제도로서 국민연금이 가진 장점도 충분하다. 기업-자본과 노동이 함께 사회 구성원의 노후 보장을 책임진다는 것이 사회연대의 핵심이고, 소득재분배 효과를 위해 누진적으로 설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와 기업이 책임을 분담해 보험료를 내는 이 시스템에서 국가와 사회는 시야에서 사라진다. 시민들은 자신이 낸 돈으로 자신의 노후를 부양한다고 생각하지, 국가와 사회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들의 삶을 함께 책임진다는 연대 의식보다, 다른 세대보다 덜 내고 더 받고 싶다는 욕망과 공정성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소득재분배의 취지가 의도대로 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해 40년 동안 매월 4.5%를 꼬박꼬박 납부한 사람과 국민연금 납부기간도 금액도 그에 비해 더 적은 비정규직의 국민연금 수령액은 천지 차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사각지대의 문제다. 결과만 놓고 보면 오히려 역진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소득보장론 vs. 재정안정론
이런 국민연금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개혁논의는 정권마다 주요 화두다. 대표적인 논쟁 지형은 '소득보장론'과 '재정안정론'의 대립이다.
먼저 소득보장론은 국민연금 수령액이 대부분 용돈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소득보장율을 높여 실질적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023년 기준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은 62만 원 정도인데 노후를 살아가기에 부족한 형편이긴 하다.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 최고 수준인 한국사회 특성까지 고려하면 국민연금만으로 노후를 대비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보험료율과 함께 소득보장률을 높여 '더 내고, 더 받자'는 주장으로 귀결되곤 한다.
재정안정론은 기금고갈 전망을 근거로 반박한다. 더 주고 싶어도 앞으로 20년 전후로 연기금이 고갈될 텐데,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료율을 올리고 소득보장률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세대가 '더 내고 덜 받아야' 미래 세대가 국민연금의 취지를 계승해 안정적으로 노후를 대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인 쟁점을 몇 가지 더 소개하면, 기금 고갈에 대해 세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주장과 세금도 결국 미래세대가 부담하는 것이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논쟁이 있다. 보험료율 인상이 국민연금의 신뢰를 하락시켜 결과적으로 사적연금에 길을 열어주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어느 입장이든 동일하다.
대안의 방향은 여러 가지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인상비율, 수급연령 등 세부 내용을 조정하는 모수개혁 방식과 아예 신연금을 만들어 구연금과 분리해 운영하자는 주장, 현재 노후보장제도에서 국민연금 중심성을 조금 내려놓고 각종 크레디트와 기초연금 등을 강화해 다층적으로 설계하자는 주장 등이다.
이런 치열한 논의와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MB정부 이후 연금개혁에 진전은 없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양당의 극한 대립으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식물국회와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길 좋아하는 대통령이 공존하는 시점에서, 윤석열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예고했다.
윤석열표 연금개혁 '30년 시간 벌기'
윤석열 정부가 발표할 연금개혁의 골자는 노후보장제도에 대한 대수술이다. 국민연금뿐만이 아니라 기초생활보장제도, 기초연금, 국민연금, 퇴직연금, 주택 및 농지 연금 등 다층 구조로 이뤄진 노후보장제도 전반을 함께 개혁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소득 하위 70%에 지급하는 기초연금의 대상 비율을 조정하거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5% 이상으로 높이는 것을 고려한다고 한다. 재정 안정화 장치도 포함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기금 고갈에 대해 자동으로 납부액을 올리고, 수급액을 줄이는 장치를 설계하는 것이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화다. 기금고갈에 대비한 보험료율 인상을 연령대별로 다르게 하겠다는 것인데, 장년층은 더 내고 청년층은 덜 내는 방향이다.
이를 통해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기존의 연금개혁 방향이 모수개혁에 그치면서 연기금 수명을 7~8년 연장하는 수준이라면, 정부안은 국민연금의 30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모두를 높이겠다는 입장,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저항을 줄이기 위해 세대별 차등화라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 국민연금의 장기 지속가능성에 대한 전망 등을 봤을 때 정부가 연금개혁에 대해 꽤 고민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국민연금의 수명을 연장해야 할까? 더 나은 대안을 상상하고 도입할 수 없는 걸까?
국민연금주의를 넘어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없을까
정의당 지도부로 있을 때, 국민연금에 대한 전문가 초청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진보진영은 기본적으로 연금개혁에 대해 소득보장론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입장의 교수님이 오셨다. 2시간 정도 강의를 듣고 이해되지 않는 지점이 있어 질문을 했다.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저출생/비정규직/플랫폼노동/소득격차 등등을 다 해결해야 하는데. 국민연금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시점 이런 사회적 조건에 맞는 노후보장 시스템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국민연금 제도는 40년 동안 매월 4.5%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납부할 수 있는 노동자가 아니면 불리한 제도다. 1차 노동시장으로 분류하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전문직이 아니면 노후보장을 제대로 받기 어렵다. 단순히 소득대체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국 노동자 평균 근속연수가 5.9년이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현대 사회에서 40년 동안 안정적으로 국민연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이런 현실에서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만 높이자는 주장은, 지금의 1차 노동시장이라는 성역을 더 공고히 하는 말과 다름없는 것 아닐까.
완성된 모습의 이상사회를 설정하고 그 이상사회가 만들어진다면 국민연금이 좋은 제도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주객전도다. 현시점 국민연금이 불평등한 제도인데 이걸 고치지 않고, 국민연금이 좋은 제도가 되기 위해선 평등한 세상을 만들면 된다니. '국민연금주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방식이 꼭 다수를 포괄하지 못하는 국민연금 제도에 다수를 편입시키는 방향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포괄하지 못하는 다수를 전제로 한 새로운 노후보장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국민연금의 기획 의도는 '사회연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현시점 연금개혁의 관심사는 사회연대가 아니라, 납부자들이 덜 내고 더 받는 시스템의 안정적인 지속가능성이다. '사회연대'는 없고 '투자안정성'만 남았다.
사라진 사회와 국가의 역할을 복원해야 한다. 어차피 연기금 고갈에 세금으로 대응할 거라면, 깔끔하게 노후보장에 대한 목적세 시스템으로 전환해서 가난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소득보장시스템을 설계하자는 것이다.
방법론은 다양할 수 있다. 기초연금을 강화해 하위 소득 고령인구를 대상으로 한 튼튼한 복지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노인 기본소득을 제안할 수도 있다. 핵심은 노후보장 책임을 국가의 역할론으로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재규정하자는 것이다. 국민연금주의에서 벗어나, 국민연금이 아니어도 더 나은 노후보장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연금을 만들 때의 사회적 합의도 쉽지 않았는데, 그것이 되겠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것이 본래 정치의 역할이다. 어렵다고 불평등한 사회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이것은 만 65세에 국민연금을 수령 받지 못할 수 있고, 수령 받아도 69만4000원에 불과한 한 노동자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