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은 청년 정치인, 현직은 동네 파스타 식당 주방보조가 현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눈살 찌푸리는 정쟁 속에서도 우리 삶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선의에 기대는 정치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편집자말] |
언젠가 홍준표 대구시장이 개 식용 금지를 이야기했을 때,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며 동료들과 웃어넘긴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치를 하면서 우리 진영이 아닌 정치인이 '맞말'을 했을 때 대부분 이런 반응이었던 것 같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기후동행카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을 때도, 한동훈 전 법무부장관이 이민청을 이슈로 던졌을 때도 비슷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진보정당이 주장하던 정책을 절반쯤 후퇴시킨 타협안을 내면, 진보정당은 "취지는 좋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다는 한계가 분명하고 그래서 너희들은 기만적인 것"이라는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곤 했다. 언제나 우리는 옳아야 했고, 상대는 틀려야 했다.
물론 정치의 생리가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자신과 상대가 무엇이 같고 다른지 드러냄으로써 갈등이 표면화되고, 이를 통해 대중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것이 정치를 참여와 논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민주주의 기본 시스템에서 많은 현실 정치인들처럼 그 역할을 타당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믿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뼈아픈 진실은 시민을 향한 정치를 말하면서 정작 시민에게 싸움 구경 말고는 보여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청년정치인을 자임하면서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며 이리저리 발버둥 쳐왔다. 그리고 그 발버둥은 실패로 일단락됐고, 지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와 조금 멀어져 있다. 동네 파스타 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손님이 없는 동안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며 직원들과 대화하는 것이 가끔의 정치생활이다. 그렇게 주방 틈새로 본 정치뉴스가 온갖 비방과 정쟁으로만 가득한 것을 보면서 조금 다른 욕심이 생겼다. 환멸과 회의보다 긍정하는 정치의 힘을 믿어보고 싶다는.
반성에 기반해서 글을 써보기로 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는 냉소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진영 역시 선의를 가지고 정치하고 있다는 신뢰로 정치를 바라보고자 한다. 누군가 어떤 정책을 발표하든 비판할 준비가 되어있는 탄탄한 논리구조와 세계관을 자랑하는 것보다, 방향성과 의지를 긍정하며 마음을 보태고 그다음 부족한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날선 비판과 합리적인 평론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서, 한 명쯤은 '긍정하는 정치'로 정치 뉴스를 해석하는 것도 꽤 쓸모 있을지 않을까.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까
정치하는 모든 사람들은 집권을 꿈꾼다. 그리고 자신들의 철학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집권이 길어져야 한다고 항변한다. 대선에 승리하면 총선에서 과반을 확보해야 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하고, 총선에서 이기면 그다음은 재집권에 성공해야 정권의 정책이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정권교체에 성공하면 지난 정부를 부정해야 하고, 야당은 여당일 때 추진했던 정책을 현 정부가 추진하면 돌연 반대하거나 침묵하곤 한다. 그러나 장기적 정책 기조는 장기집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 합의한 방향과 기조를 긍정하고 승복하는 성숙한 문화에서만 가능한 법이다.
이를테면 이런 접근 방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흔히 한국 고등교육 문제를 이야기를 할 때, 지금의 학벌사회와 일자리 문제의 핵심 원인으로 1995년 문민정부가 시행한 5.31 교육개혁의 기조인 대학설립준칙주의를 꼽는다.
쉽게 말하면,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로 대학 설립 조건 규제를 완화하면서 무분별한 대학설립이 난무했고 결과적으로 부실대학 양산과 대학기업화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대학설립 준칙주의는 현시점 교육불평등과 대학구조조정의 현실적 어려움, 기초학문 고사 등 고등교육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고학력자 증가로 인한 청년 일자리 미스매칭과 더 나아가 저출생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적 주범으로 지목된다.
그런데 다른 이면을 살펴보자. 대학설립준칙주의로 인해 50%미만이었던 대학진학율은 80%가 넘었던 시점이 있었고, 현재에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러한 고학력자 증가로 인해 다른 사회문제들도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의 기회를 포괄적으로 갖는 것이 과연 나쁘기만 할까? 지식과 배움이 평등해야 한다는 가치관으로 본다면, 고등교육 확대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학벌 조성과 대학진학을 위한 사교육 불평등과 교육비용 사적전가는 앞으로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다만 대학이 무분별하게 생겨난 것이 원인이니, 이미 만들어놓은 대학들을 필요 이상으로 없애고 굳이 높아진 대학 진학률을 낮추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역발상으로 대학 진학률을 100%에 가깝게 올리는 방식은 어떨까. 그 과정에서 '고등교육까지 의무교육' 등 구체적 대안을 놓고 학벌사회와 교육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논의해보자는 아이디어다. 일단 대학설립준칙주의의 결과를 긍정하면서, 그 긍정에서 출발해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조롱 대신 존중의 정치 문화를
정국을 휩쓸고 있는 '채상병 특검'에 한 명의 국민의힘 의원이 찬성표를 던졌다. '철수정치'의 대명사 안철수 의원이었다. 안철수 의원은 "민심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야 한다"며 소신 표결의 이유를 밝혔고, 국민의힘 안에서는 공분의 대상이 됐다. 그렇다고 안 의원의 소신 표결에 야당 진영의 응원과 지지가 강력한 것도 아니다. SNS에선 안철수 의원에 대해 "이번에는 왜 철수하지 않았냐"는 야당 지지자들의 조롱하는 반응들도 꽤 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표결 내용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서든, 조직적 합의를 배반하는 소신 표결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부재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민주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한 곽상언 의원이 민주당이 발의한 4명의 검사 탄핵소추안 중 1명의 안건에 기권 표를 던진 것이다. 곽상언 의원은 "제안 설명만 듣고 탄핵 찬반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해 기권했다"고 밝혔다. 민주당 강성 지지자들 사이에선 곽상언 의원이 고 노무현 대통령 사위로서 도의를 저버렸다며 검사 이전에 곽상언 의원부터 제명한다는 비난이 거셌고, 결국 곽 의원은 원내부대표를 사퇴해야 했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 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여러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는 3당 합당 당시 소신의 정치를 외친 것이다. 그런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라는 사실을 자산으로 삼아 국회의원이 된 사람한테 "당신은 조직적 합의를 무시하고 소신 표결했기 때문에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정치를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접하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야합에 반대하며 소신정치를 하는 것이 멋있게 연출되곤 하지만, 현실에선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당론은 정당이라는 공동체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고, 그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토론과 회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반대하는 개인 입장을 가졌다면, 먼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입장을 바꿔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려워졌다면 승복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그래야 조직 내 건강한 토론과 결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민주당이 발의한 '채상병 특검'에 반대 표결한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의 소신 표결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는 채 상병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민주당이 발의한 구체적 내용(재판 기한, 특검 추천 권한 등)에 대해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합리적인 척하더니 국민의힘 소속 의원이라 결국 어쩔 수 없다며 조롱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김재섭 의원은 당론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자기 소신도 지켰다.
민주 사회라면 소신이든 일탈이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용기 있는 소신일지, 반조직적 일탈이 될지는 사안마다 다르고 결과적 평가일 텐데, 이를 용인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 자체가 사라져선 안 된다. 여야의 강성 지지자들 모두가 조금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소신 정치를 존중하기보다, 일단 조롱부터 하고 보는 정치문화라니. 얼마나 암울한 일인가.
주방과 정치는 닮아 있다
식당에서 일하다 보면 홀과 주방의 온도차는 많이 다르다. 손님들은 홀에서 자신이 주문한 메뉴를 평온하게 기다리고, 메뉴가 나오면 식사를 시작하고, 식사를 마치면 계산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주방에서는 그 메뉴를 만들기 위해 전쟁통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메뉴가 잘못 나올 때도 있고 구체적인 레시피가 틀릴 때도 있다. 그래서 서로 다투기도, 일과 책임을 미루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런 주방의 시간을 거치고 나야, 손님들이 맛있게 식사할 수 있다.
현실 정치의 세계도 비슷한 점이 있다. 시민에게 좋은 정치를 제공하기 위해, 뉴스에 나오는 모습들에 더해 그 이면에서도 정치하는 사람들을 늘 치열하게 다툰다. 그 결과로 우리사회는 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정치하는 사람들의 신뢰와 선의다.
우리 정치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하고 조명하고 요구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정치를 긍정하는 힘을 조금씩 쌓아나갔을 때, 정치의 본질이 정쟁이 아니라 협치라는 판타지가 현실에서 증명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