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습니다. '온열질환' '폭염' 같은 걱정이 여름이 상징이 된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역경을 딛고 자라나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여름입니다. 이상기온을 뚫고 결실을 맺은 여름 농산물과 알알이 담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
흔히 말랑말랑한 식감의 '물복'과 아삭한 식감의 '딱복', 그리고 털이 없는 천도복숭아 정도로 복숭아를 구별한다. 하지만 그 품종이 무려 2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테다.
복숭아 농원에서는 적기에 수확해 출하해야 하는 복숭아 특성을 고려, 여러 품종을 한꺼번에 식재해 수확 시기의 노동량을 조절하곤 한다는데. 우리가 몰랐던 복숭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옥천읍 삼청리에서 복숭아를 기르는 두 농원을 방문했다.
복숭아밭은 어떻게 생겼나
복숭아 농사의 시작은 무엇부터일까. 밭을 기획하는 것부터일 테다. 복숭아는 적기 수확이 중요하기에 시기별 수확량과 노동력을 세심히 계산해 밭을 디자인해야 한다. 수확 시기에 따라 복숭아는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으로 나뉘는데, 그 안에서도 품종마다 수확 시기가 달라 농원마다 다채로운 밭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일반적으로 조생종은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중생종은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만생종은 8월 중순부터 9월까지 수확한다).
산들꿈농원에서 자라는 복숭아 가짓수는 20여 종. 장현철(61)씨는 품종마다 10~20그루 남짓 심어 6월부터 9월까지 꾸준히 복숭아를 수확할 수 있게 밭을 구상했다. 일찍 수확하는 조생종을 집 멀리, 가장 늦게 수확하는 만생종을 집 가까운 밭에 식재한 것은 일의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하는 그의 기지다.
산들꿈농원을 방문한 7월 11일은 조생종 수확이 얼추 끝난 시기, 장현철씨가 조생종에 속하는 천중도(백도)와 수황(황도)을 툭툭 깎아 그릇에 낸다. 조생종은 중생종, 만생종과 비교해 영양분을 흡수하는 시기가 짧은 편이라 알이 작고 당도가 약하다. 이에 그가 택한 방식은 무대농법과 초생재배다.
"열매가 어느 정도 자라면 병충해를 대비하고자 봉지를 싸요. 복숭아는 햇빛을 많이 봐야 붉어지고 맛도 좋아지는데 봉지를 싸면 해를 많이 못 보죠. 조생종은 금방 수확하니 병충해 피해가 적은 편이라 봉지 없이 재배하는 무대농법을 사용해 햇빛을 더 많이 보게 해요. 더불어 밭에 풀이 자라 있는데, 이 풀이 벌레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해요."
풀을 함께 기르는 초생재배는 깊숙이 박힌 풀뿌리를 통해 땅에 산소를 공급하고, 풀을 잘라 퇴비로 활용하기도 하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낸다. 다만 우려스러운 건 갈수록 일러지는 수확 시기다.
"제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15년 전에는 4월 15일이 지나고서야 꽃이 폈어요. 요즘은 10일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죠. 꽃이 일찍 피니, 과실 익는 시기도 당겨지고요. 예전에는 6월 20일에도 복숭아 수확하기에 이르다고 했는데, 이젠 10일쯤 되면 다들 수확하기 시작해요. 저도 11일에 첫 수확을 했고요."
짧게는 5일에서 보름 남짓한 변화는 일정 변동 이상의 역풍을 불러온다. 꽃이 진 후 열매가 달리면 땅의 영양과 햇빛을 받아 크기와 당도를 높여가는 시간이 필요한데, 요즘 날씨는 복숭아의 무르익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복숭아와 함께하는 1년
농사란 자연이 하는 일이라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장현철씨는 정성 들여 키운 복숭아가 더 건강하도록, 더 좋은 곳에 가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복숭아 농사는 가을부터예요. 예전에는 봄에 퇴비를 했는데, 지금은 가을에 하는 걸로 바뀌었어요. 나무의 영양 저장고는 잎사귀거든요. 그래서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은 10월, 수확 직후에 퇴비를 주죠. 그래야 잎사귀가 저장한 양분으로 튼튼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거예요."
잎사귀가 영양분을 잘 저장한 채 겨울이 되면 전지·전정 작업을 한다(전지와 전정은 모두 가지를 자르고 다듬는다는 뜻이지만, 전지는 생장에 무관하거나 방해가 되는 가지를 제거하는 것, 전정은 개화와 열매의 상태를 조절하기 위해 가지를 잘라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작업은 나무의 영양이 과도하게 분산되지 않도록, 힘이 약하거나 생육에 방해가 되는 가지를 제거하는 작업이다. 이후 봄이 찾아오면 적절한 약을 뿌리고 수형 관리를, 꽃이 피면 적화, 열매가 나면 적과 작업을 통해 튼튼한 복숭아가 되도록 돕는다. 열매가 어느 정도 크기를 키우면 봉지로 싸뒀다가, 때에 맞춰 수확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복숭아를 키워내면, 더 중요한 일이 남는다. 바로 판로 확보다. 판로를 잘 마련하면 농사를 두 번 짓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데, 장현철씨는 옥천과 세종 로컬 푸드직매장, 대전 파머스마켓 베지래빗804, 그리고 직거래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통단계를 줄일수록 생산자들 수익이 커져요. 소비자들도 더 신선한 과일을 먹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요. 파머스마켓은 다섯 번을 찾아 설득했어요. 어떤 복숭아를 키우고 있는지 소개하고, 복숭아 수확을 시작하고서는 직접 들고 가 상품을 보여주기도 했죠."
한편 장현철씨는 지난 7월 26일 옥천군 제12대 포도왕에 선정, '제15회 향수 옥천 포도복숭아 축제'가 열린 8월 2일과 3일에는 품종전시실에서 생산한 월미와 황진주를 선보였다.
유기농 농법으로 키워낸 천도복숭아
"어른들이 천도복숭아를 '뺀질이'라고 불러요. 털이 없어 표면이 매끄럽다고요. 털복숭아는 따로 부르는 말이 없는데, 천도복숭아는 재밌는 별명이 있죠."
김은희(46)씨는 각 1000평 규모의 3개 밭에 12개 품종의 복숭아를 재배한다. 한창 중생종 복숭아를 수확하던 7월 25일, 그의 삼청리 밭을 방문했다. 삼청리 밭에는 다양한 천도복숭아(옐로우드림, 썬, 스위트퀸, 금홍, 이노센스)가 가득했는데, 매끈히 반짝이는 천도복숭아의 자태에 자꾸만 '뺀질이'라는 별명이 떠올라 웃음이 지어진다(천도복숭아는 동해에 취약해 주로 남쪽지역에서 재배하는 편이라 옥천에서는 보기 어려운 품종이다. 김은희씨는 충북농업기술원과 협업해 동해에 강한 천도복숭아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김은희씨는 복숭아 전량을 한살림에 납품, '한살림 참여인증'을 통해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다. 복숭아는 병충해, 토양 상태 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과실로 "무농약 재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택한 방식이다.
"저독성 비료와 농약만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제초제는 아예 사용을 못 하고요. 또 외부로부터 균, 해충, 농약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필지에 방풍망 설치도 해야 해요."
한살림 참여인증 기준에 따르면 진딧물 약은 한 해에 1회 사용이 최대다. 보통은 진딧물이 나타나는 5월에 한 차례 살포하면 진딧물과의 싸움이 끝이 나는데, 올해는 5월에 이어 6월에도 진딧물이 기승을 부렸다. "진딧물 약을 쓰면 싹 사라지는 걸 아는데도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에 속이 탔다"는 김은희 씨. 그런데도 그가 까다로운 농법을 고수하는 이유는 꽤 실리적이다.
"일반 시장은 커다랗고 흠결 없는 복숭아만 취급하죠. 그런데 한살림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바람과 벌레 등에 상처 난 복숭아도 납품할 수 있어요. 소비자들이 재배 과정에서 복숭아에 흠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그렇다고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김은희씨는 "소비자가 생산자의 고충을, 과실이 자라는 과정을 안다는 것은 생산자에게도 큰 강점"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소비자에게 최상의 복숭아를 전달하고자 그가 지키는 원칙은 '당일 수확, 당일 출고'다. 이 원칙을 위해 그는 새벽 2시부터 복숭아밭을 찾는다.
"새벽 2시부터 아침 8~9시까지 복숭아를 따고 오면, 아침먹고 나서부터는 작업장에서 포장 작업을 하죠. 2시 전까지 포장을 마쳐야 당일 출고가 가능하거든요. 체력이 좋아서 할 수 있다기보다, 정신력으로 하는 것 같아요."
건강한 복숭아는 건강한 생산자로부터
농사를 지은 지 10년 차가 된 이제야 "농사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는 김은희씨는 "좋은 복숭아를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 이파리가 많고, 동해에 강할 것, 과실이 큰 것 등 여러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은 '생산자가 일하기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사가 몸을 쓰는 일이니 몸이 안 좋은 선배 농민들이 많아요. 건강한 농산물을 재배하려면 생산자가 우선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오래오래 농사를 지을 수 있잖아요. 식재할 때 여러 품종을 심어보며 내게 가장 잘 맞는 품종을 골라내고, 작업장도 몸에 무리가 안 되게끔 조성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건강한 생산자가 건강한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농사는 농민과 자연이 합을 맞춰 작물을 길러내는 것이기에 건강한 생산자엔 자연히 '지구'도 포함될 수밖에 없다.
"3년 전 여름부터 복숭아가 더 민감해졌어요. 여름이 너무 습하고 덥다 보니 하루만 수확이 늦어져도 무르고 맛이 변해요.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복숭아는 곤충을 통해 수정하는 충매화예요. 2년 전부터 눈에 띄게 벌 날아다니는 소리가 줄었어요. 다행히 아직은 찾아오는 벌들이 열심히 일해줘서 수정엔 무리가 없었는데 앞으로가 걱정이죠."
기후위기는 농원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와 복숭아나무 사이를 휘젓고 있다. 올해는 유독 열과 피해가 컸다. 수확을 앞두고 장마가 찾아와 수분이 과하게 공급되면서, 열매가 터져버린 것이다. 기대한 수확량의 30%는 포기해야 했다고.
김은희씨는 "자연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지만, 나무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도움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무는 내가 해주는 만큼 되돌려줘요. 나무를 잘 들여다보면 무엇이 필요한지 보이죠. 이파리가 형광을 띄면 광합성이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마그네슘을 뿌려주곤 하죠. 여기서 중요한 건 즉각적인 반응이에요. 건강한 나무와 복숭아를 보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죠. 그래서 눈 돌릴 때마다 할 일투성이네요(웃음)."
최고의 복숭아를 찾는 법 |
장현철씨 : "진짜 맛있는 복숭아 품종이요? 대향금과 백천황도가 정말 맛있어요. 대향금은 붉은빛이 돌면서 말랑한 식감이고, 백천황도는 노란빛에 식감이 더 단단한 편이죠. 둘 다 잘 후숙하면 망고 맛과 헷갈릴 정도로 당도가 아주 높고 말랑해져요."
김은희씨 : "복숭아는 겉모습으로 맛을 확인하기 어려워요. 여러 복숭아를 드셔본 뒤에 입맛에 맞는 품종과 농원을 기억해 둔다면 취향의 복숭아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월간옥이네 통권 86호(2024년 8월호)
글‧사진 이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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