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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친일파는 현재 진행형이다. 해방 후 친일 청산에서부터 작금 권력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하나의 흐름이다. 우리는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했다. 그들은 분단 세력이자 반공으로 탈을 바꿔 썼다. 그리곤 대를 이어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언론·학문 등 제 부문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안에 오점투성이 우리 근·현대사가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내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손화중 피체지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아이러니다.

고창 부안면 봉암리 봉오마을에 큰고모 댁이 있었다. 어릴 적 봉암 가는 길은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는지….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만원 버스는 힘겹게 참 부지런히도 다녔었다. 봉오와 이웃한 송현리 고잔마을 앞 들판 끝자락 외딴집이, 그가 붙잡힌 곳이란 사실을 나이 들어서야 알았다. 어른들이 쉬쉬하며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씨 재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고잔마을 남쪽 들판 가장자리에 자리한 이씨 재실. 손화중의 마지막 은신처였다.
▲ 이씨 재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고잔마을 남쪽 들판 가장자리에 자리한 이씨 재실. 손화중의 마지막 은신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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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봉암리나 선운리행 버스를 애써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정주가 걸어서 넘어 다녔다는 '질마재'를 힘겹게 타고 넘지도 않는다. 22호 국도가 선운사 지나 곰소만과 만나기 직전, 주진천(인천강)의 자그마한 다리만 건너면 곧장 선운리에 가 닿기 때문이다.

선운리는 서정주 고향이다. 그런 까닭에 폐교된 봉암초 선운분교가 그의 시문학관으로 변해있다. 시에 대해 논할 깜냥엔 어림없으나, 같은 고향 사람으로 그의 어떤 시가 그리도 창대하고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다.

그는 시인이기 전 명백한 친일파다. 그러면서 훗날 '종천순일(從天順日=하늘을 따르고 해에 순종한다)'이라는 궤변으로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 한 비겁마저 내보였다. 친일을 마치 자연의 순리처럼 따랐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끝내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사과나 반성도 하지 않았다.

미당시문학관 옛 봉암초 선운분교가 폐교하자 이를 개조해, 이 마을이 고향인 시인 서정주의 문학관으로 변모하였다.
▲ 미당시문학관 옛 봉암초 선운분교가 폐교하자 이를 개조해, 이 마을이 고향인 시인 서정주의 문학관으로 변모하였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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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리 이웃이 송현리고 그 너머가 봉암리다. 송현리와 봉암리는 대대로 연일정씨 세거(世居)다. 방장산 넘어 전남 장성에 살던 울산김씨 요협(堯莢)이 봉암리 정씨 딸과 혼인한다. 그러면서 봉암 인촌마을로 이주해 온다.

정씨는 만석꾼이었다. 요협은 상당한 농토를 증여받는다. 처가의 힘이었는지 어쨌건 관직에도 오른다. 요협은 이 둘을 바탕으로 재산을 일궈 나간다. 그리곤 서슴없이 친일의 길로 발을 내디딘다. 당시 호남 지주들 공통된 특징이다.

군산 개항(1899)과 더불어 호남평야 쌀이 일본으로 끝도 없이 실려 나간다. 요협은 줄포항으로 거점을 옮긴다. 당시 줄포는 군산에 맞설 만한 대규모 무역항이었다. 쌀 수출로 호남 지주들이 손쉽게 돈을 번다. 요협도 그들처럼 큰 부를 거머쥔다.

이는 농토확장의 또 다른 밑거름이었다. 그렇게 쌓인 부는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며, 울산김씨를 손꼽히는 대지주로 변모시켜 주었다. 수많은 농민의 고혈을 빨아서 말이다.

서정주는 그의 시에서 '아버지는 마름'이었다고 술회한다. 다름 아닌 울산김씨 마름이었다. 봉암의 울산김씨는 요협의 손자인 성수(性洙)에 이르러 나라 안 몇 손가락에 드는 거부로 발돋움한다. 열렬한 친일의 결과다. 성수의 호 인촌(仁村)은 할아버지가 처음 이주해 온 마을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내 고향은 친일파 일색이었던 모양이다. 수년 전 큰 용기로 할아버지 친일 행적을 사죄한 전 국회의원 모(某)도 같은 고향 사람이다.

손화중 피체지

송현리 고잔마을과 봉암리 봉오마을 남쪽 들판 가장자리, 소요산 자락이 뻗어내린 산 아래 외로이 집 한 채가 앉아있다. 거부 친일파와 친일 문학인이 탄생한 마을을 좌우에 두고서 말이다. 이 외딴집이 이씨 재실(齋室)이다. 이 재실에 손화중이 은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감으로 마지막임을 알아차렸을 터다. 바닷바람은 또 얼마나 맵찼을까.

손화중 피체지 재실 주인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해 포상을 받으라”며 종용함으로써 붙잡힌다. 12월 11일(음)이다.
▲ 손화중 피체지 재실 주인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해 포상을 받으라”며 종용함으로써 붙잡힌다. 12월 11일(음)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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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자신을 믿고 따라 준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해 포상을 받으라"며 종용함으로써 붙잡힌다. 12월 11일(음)이다. 고창과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다. 이봉우는 훗날 평안도 증산 현령에 제수된다.

이봉우(李鳳宇)라는 자는 본래 서울에 있던 자로서 갑오년 봄에 고창읍에 들어와 손화중의 부하가 되었던 자다. 갑오년 겨울에 동학군의 패함을 보고 관병에 부화(附和=자기 주견 없이 맹목적으로 다른 이의 말에 따름)하여 그 두령인 손화중을 잡아주고 증산 군수를 얻어 한 자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79)

1894년 11월 말, 남녘을 지키던 손화중과 최경선이 나주목사 민종렬과 큰 전투를 벌이나 패하고 만다. 이후 크고 작은 격전을 치른 손화중은 그의 오랜 근거지인 선운사 근처 이봉우의 재실을 은신처로 택한다. 다시 일어설 방도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대세는 기울고 전봉준·김개남 등이 붙잡혔다는 소문이 바람에 실려 온다. 그들과 같이하기로 다짐한 손화중은 심중을 굳혔을 터다. 재도거사(再度擧事=또다시 반란이나 혁명을 크게 일으킴)가 감당키 힘든 무게로 짓누른다.

재실 앞마당 소요산 자락이 뻗은 산 아래, 북향의 작은 재실이다. 이곳에 손화중이 몸을 숨겼다.
▲ 재실 앞마당 소요산 자락이 뻗은 산 아래, 북향의 작은 재실이다. 이곳에 손화중이 몸을 숨겼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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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피하지 않는다.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일망정 떳떳해야 한다. 수십만 백성이 두 눈 부릅뜬 생령(生靈)으로 산화했단다. 누군가 책임져야 할 것 아닌가.

붙잡힌 전봉준과 김개남이 어떤 길을 택했을지는 명확하다. 그들도 떳떳한 죽음의 길을 택할 것이다. 동지 아니던가. 갑오년 내내 많은 도움을 준 집주인도 나로 인해 처벌받지 말아야 한다. 나를 고발하라 종용하는 가늠조차 어려운 인품의 깊이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뜻대로 붙잡힌다.

최경선과 김덕명, 이방언

손화중의 온화하고 인자한 품성이 동학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결정적인 건 2차 봉기다. 전봉준이 손화중과 최경선에게 후방을 부탁한다. 혁명이 성공한다면, 공(功)이 반으로 깎일 수도 있는 역할이다. 하지만 둘은 대의에 따른다.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남해로 상륙한다면 결과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손화중 준수한 외모에서도, 온후하고 인자한 품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진이다.
▲ 손화중 준수한 외모에서도, 온후하고 인자한 품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진이다.
ⓒ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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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 패배 후 광주와 나주의 많은 군사가 장흥 석대 들판에서 싸웠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장흥에 가지 않는다. 나주 전투 패배 후, 화순 동북을 거쳐 다시 남평을 차지한다. 그러자 나주 초토영의 포군과 일본군이 급습한다. 남평 전투를 마지막으로 손화중과 최경선이 헤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능주 쪽으로 빠진 최경선은 동북 벽성리에 은거하다가, 역시 밀고로 붙잡히고 만다.

최경선 동학혁명 내내 용맹하게 싸웠다 주요 전투마다 선봉장으로 나섰다.
▲ 최경선 동학혁명 내내 용맹하게 싸웠다 주요 전투마다 선봉장으로 나섰다.
ⓒ 정읍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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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의 터줏대감은 단연 김덕명이다. 교조신원운동부터 동학혁명 전 과정에서 원평의 군사는 큰 힘이었다. 이를테면 묵묵하게 뒷받침한 든든한 역할을 김덕명이 도맡은 셈이다. 그의 휘하에 김인배, 김봉득, 송태섭 등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주요 전투마다 큰 공을 세우곤 했다.

김덕명은 원평에 세거를 이룬 언양김씨다. 동학혁명 와중 부호인 언양김씨 여러 집이 피해를 본다. 그럼에도 인명 살상만은 막았다고 하니, 그가 추구한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덕명은 전봉준과 우금티 전투를 함께한다. 패배와 후퇴를 거듭하며 구미란 전투를 치른다. 이 싸움으로 원평은 초토화가 되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까. 구미란 전투를 끝으로 원평 깊은 골짝, 안정 절골의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한다.

거기서 문중에 도움을 요청해보나, 거꾸로 고발되어 잡히고 만다. 그가 베푼 덕이었는지, 교형 당한 그의 시신은 무사히 선산에 안치된다. 어떤 이유에선지 최경선의 시신과 더불어 그의 시신도 온전하게 수습되었다고 한다.

이방언은 장흥 석대 들판의 주역이다. 황룡강 전투에서 장태라는 무기로 승리를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주화약 후 고향 장흥에서 집강소를 열어 서정을 베푼다. 2차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석대 전투가 패배로 끝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장흥에서 수백 석 지기 지주이자 양반인 이방언은 지역 유지다. 장흥 사람이면 누구나 그를 알아보았다. 조병갑을 능가하는 악질 이두황의 손에 붙잡혀 나주 옥에 갇혀있다가 무죄 방면된다. 흥선대원군의 뒷배라는 풍문이 떠돈다. 여러 말들이 오간다.

얼굴이 알려진 이방언은 부득이 보성 땅 회령(회천)면 새터에 사는 이 의원 집에서 숨어 지낸다. 하지만 위정척사파인 전라감사 이도재가 끝까지 그를 추적해 붙잡아드린다. 흥선대원군을 보호하려는 이도재 의도대로, 김개남처럼 그도 외아들과 함께 장흥부 장대에 효수된다.

장흥 묵촌 이방언의 고향이다. 뒷산에서 그의 묘소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 장흥 묵촌 이방언의 고향이다. 뒷산에서 그의 묘소를 찾으려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 이영천(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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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묵촌의 인천이씨 집안도 덩달아 쑥대밭이 된다. 그 많던 이방언의 재산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의인이 받은 처참한 대우다.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는 독립군 후손을 보는 느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왜 이리 비겁한 역사만 자꾸 써 내려가는지…

#손화중#서정주김성수#김덕명#최경선#이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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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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