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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한 세월이 길다. 몇 살부터였을까. 열? 아니면 아홉? 내 부모는 내가 학교에 가기 훨씬 전부터 배를 깔고 앉아 책장을 들춰보고는 했다고 하니 다섯이나 여섯 살 부터였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급 책장에 꽂힌 수십 권의 책을 모조리 끝내고 또래는 읽지 않는 온갖 책으로 옮겨갔으니 독서가로의 삶이 제법 일찌감치 시작됐다 해도 좋겠다.

책을 좋아한단 것이 남들에겐 특이해 보였을까.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책선물이 모여들곤 하였다. 친척이며 부모님의 친구들, 이웃들까지 무슨무슨 날이면, 꼭 그런 날이 아니래도 내게 책을 건네는 날이 많았다. 주변에 책이 많지 않을 때,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는 모든 책 선물이 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법 머리가 굵고 나만의 책장을 갖고 난 뒤에는 책 선물이 그리 탐탁지는 않았다.

왜냐고? 책을 몹시 좋아하던 아이는 가진 책을 모조리 읽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내게 좋은 책도, 좋지 않다 느껴지는 책도 한 장 한 장 씹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는 하였다. 세상엔 감탄을 자아내는 책만큼 그렇지 못한 책도 있는 것이어서, 선물 받은 형편없는 책을 수시로 욕을 씹어 뱉으며 읽어낸 순간도 적지 않은 것이다. 집념인지 고집인지 강박인지 알 수 없는 고집은 책장 안에 읽지 않은, 그러나 불만족 할 것이 분명한 책을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게 책 선물은 기쁨보다는 달갑지 않은 짐덩이로 다가올 때가 잦았다.

그럼에도 책선물은 끊이지를 않았다. 중학교 사춘기 아이던 시절부터 이 글을 쓰고 있는 마흔 가까운 내게까지 말이다. 그리하여 비우고 비워도 수백 권이 족히 남은 나의 서재 가운데는 여전히 읽지 못한, 숙제처럼 남겨진 몇 칸이 남아 있다. 거기엔 누군가 내게 건넨, 그이의 표정과 말투가 생생히 따라붙는 선물로 받은 책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빼곡히 들어차 있다.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책 표지
▲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책 표지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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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차지한 원서, 마침내 끝을 봤다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도 그중 하나다. 내 책장에 들어온 지가 무려 5년 가까이 되었는데, 함께 언론사에 입사하고 이제는 한국 대표 진보지의 기자로 가 있는 동료가 무슨무슨 이유로 내게 건넨 책이다. 그녀가 어느 나라 헌책방에선가 구입했다는 이 책이 도대체 어떤 인연으로 내게까지 흘러든 것인지가 나는 꽤나 오랫동안 불만이었다. 그건 딱 하나의 이유였는데, 위에 적은 것처럼 책이 영어로 쓰여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시대 아주 보통의 80년대 생이다. 말하자면 정규교육과정 가운데 영어교육을 충실히 이수하였으나 그를 능통히 쓰고 읽을 기회는 갖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영어를 하느냐 하면 할 수는 있는 것 같은데, 또 잘 하냐 하면 잘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또 평생 영어를 쓰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삶을 살면서도 영어를 아예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때때로 영어로 된 문장 몇 덩이를 읽어야 할 때는 있지만, 아예 책 한 권을 영어로 읽으라 하면 한숨부터 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 들어온 책이니 읽어야 할 일이다. 내 책장 가운데서 5년이 넘도록 열고 닫지 못한 책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미룰 만큼 미룬 뒤 책장을 연 건 바로 그래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나는 영화로 먼저 접했다. 사실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영화 또한 광고만 많이 보았지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까. 조니 뎁이 주역인 윌리 웡카로 분한 분장이 내게는 과하게 느껴졌고, 애들이나 보는 과장된 영화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외출 때마다 꺼내들고 책을 읽었다.
▲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외출 때마다 꺼내들고 책을 읽었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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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과 함께 한 열흘, 마침내 읽어낸 이야기

책 깨나 좋아한다던 이가 내게 애들이나 읽을 법한 책을, 그것도 영어로 쓰인 원서를 선물로 건넨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탐탁지 않은 기분으로 매일 이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기차에서, 또 산책을 하며, 나는 책을 펼쳐들고 몇 줄을 읽고 모르는 단어를 검색하고는 다시 몇 줄 씩을 읽어나갔다. 그렇게 꼭 열흘 쯤이 지난 뒤 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은 이가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책 제목에도 언급된 찰리다. 부모와 양쪽의 조부모까지 모두 여섯의 어른, 아이는 찰리 하나다. 가족을 먹여살리는 건 치약공장에 다니는 찰리의 아버지 버켓씨 뿐이다. 그마저도 치약공장이 갑자기 문을 닫아 거리에서 눈을 치우는 일 따위로 생계를 이어간다. 입은 많은데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가족의 생계가 어찌나 처절한지. 어린 찰리의 삶은 얼마나 가난했던가.

거의 블랙코미디나 다름없는 처절한 가난이 동화적 필치로 아무렇지 않게 펼쳐진다. 소설에 묘사된 가난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적자면 이러하다.

In winter, all four old people lay in the one bed, two at either end, to keep each other warm, and the two parents, in their clothes, slept in the other room, on the floor.
겨울에 조부모 네 사람은 한 침대 양 끝에 두 사람씩 누워 서로를 몸으로 덥혀야 했다. 부모 두 사람은 다른 방의 바닥에서 그들의 옷을 감싸고 누워 자야 했다.

He wore a thin overcoat that was far too small for him, and he always went about with his hands stuffed deep in his pockets.
찰리는 얇은 코트를 입었는데 너무나 작았다. 그는 항상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아마도 너무 추워서).

They always got the same, every day: bread and margarine for breakfast, boiled potatoes and cabbage for lunch, and cabbage soup for supper.
그들은 항상 똑같은 걸 먹었다. 아침으로 빵과 마가린을, 점심엔 끓인 감자와 양배추를, 저녁에는 양배추 수프를 먹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스틸컷
▲ 찰리와 초콜릿 공장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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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난 속 탈출구를 찾다

지독한 가난 가운데서 찰리의 즐거움이란 쓰레기통을 뒤져 초콜릿을 감쌌을 포장지를 찾는 것이었다. 거기 묻은 초콜릿 부스러기를 핥아 그 맛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는 동네엔 세계적인 명사이자 끝내주는 초콜릿을 개발한 천재적 사업가 윌리 웡카가 운영하는 공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들어진 초콜릿은 대단히 맛이 좋았는데, 찰리는 딱 일년에 한 번 그걸 제대로 먹을 수가 있었다. 그의 생일날이었다.

소설은 윌리 웡카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초대하여 그의 유명한 공장을 견학토록 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초콜릿 포장지를 뜯으면 초대권인 '골드 티켓'을 찾을 수가 있는데, 이를 발견한 다섯 명에게 행운이 돌아가는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그 티켓을 꿈꾸는 가운데, 한 명씩 그 주인공이 나타난다. 끊임없이 먹는 살찐 아이 아우구스트 글룹, 멈추지 않고 껌을 씹어대는 바이올렛 뷰리가드, 원하는 건 부모가 죄다 해주는 철없는 부잣집 딸 버루카 솔트,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마이크 티비, 그리고 주인공 찰리 버켓이다.

어른들이 어렵게 모은 돈으로 겨우 초콜릿 하나를 구해 찰리에게 선물하는 순간, 조 할아버지가 남몰래 감추고 있던 동전을 몰래 건네 초콜릿을 또 하나 구해오도록 하는 장면, 우연히 동전을 주운 뒤 유혹을 참지 못하고 상점으로 달려가 초콜릿을 사는 장면 등등. 소설은 찰리가 마지막 초대장을 갖는 예고된 순간까지를 거듭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게 하며 기술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대가 이루어질 즈음이 되어 모든 독자가 그를 응원하도록 한다.

그로부터 공장에 들어선 다섯 아이 가운데 넷이 하나씩 사고를 당하는 과정은 이 소설의 특별한 즐거움이라 해도 좋겠다. 가히 꿈과 환상의 세계라 해도 좋을 낯선 풍경이 아무렇지 않게 펼쳐지는 가운데, 아이들은 저들이 상징하는 각각의 죄악으로 마땅한, 어쩌면 지나칠 수도 있을 형벌 같은 사고를 당한다.

식탐과 교만, 탐욕과 나태, 어른과 아이가 모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악덕이 치명적 실패와 맞닿는 장면은 아마도 소설의 주된 독자인 어린이들에게 쉬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경고와 암시로써 기능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웡카 스틸컷
▲ 웡카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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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과 함께라면 즐거운 도전이 될 것

해맑다기보단 음침하고 처절하며 일부 잔인하기도 한 로알드 달의 소설이 아동소설로써 불굴의 생명력을 얻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1971년과 2005년, 그리고 최근까지 세 차례나 영화화돼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2005년작은 당대 최고 스타인 조니 뎁이 주연해 화제를 모았고, 올해 개봉한 <웡카>에선 티모시 샬라메가 윌리 웡카 역을 맡아 열연했다.

작품이 그린 초콜릿 공장의 환상적 공정이 지금 보아도 파격적이며 신선하여 영상화할 때도 충분한 자극이 되리란 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하여 아이들에게 건네는 강렬하고 선명한 메시지, 또 가난 가운데서도 불변의 미덕을 지켜내는 이가 합당한 보상을 얻는 결말이 여전한 생명력을 가졌다. 로알드 달은 이 작품을 비롯해 <그렘린> <마이 리틀 자이언트> <마틸다> <마녀를 잡아라> <제임스와 슈퍼복숭아> 같은 아동 문학작품을 여럿 남겼다. 그중 대다수가 영화화됐다는 점은 그 소설이 지닌 상상력과 생명력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한다.

무엇보다 부족한 영어실력에도 원서를 읽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만큼 쉬운 단어와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앞서 영어로 읽어보았던 몇 편의 소설, 이를테면 <어린 왕자> <노인과 바다> <갈매기의 꿈> 등에 비해 보다 복잡한 구성을 가졌음에도 더욱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었단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읽기 전엔 거부감이 적지 않았으나 왜 이 책을 원서로 읽는 이가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독서가 주는 이로움은 비단 내용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른 언어로 더듬더듬 읽어가는 일이 뇌를 자극하고 상상을 북돋는다는 건 기록할 만하다. 이 글을 통해 누군가 도전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가 맛본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을 테다. 나는 내게 책을 건넨 이가 그러했듯, 그의 도전 또한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harlie and the Chocolate Factory (Paperback, 미국판)

로알드 달 (지은이), 퀸틴 블레이크 (그림), Puffin(2007)


#찰리와초콜릿공장#CHARLIEANDTHECHOCOLATEF#로알드달#동화#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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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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