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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남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서울 용산구 한남·보광·이태원·동빙고동 일대에서는 집주인이 세입자 주거이전비 부담을 덜기 위해 세입자를 내쫓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사진은 한남동의 한 골목길.
 한남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서울 용산구 한남·보광·이태원·동빙고동 일대에서는 집주인이 세입자 주거이전비 부담을 덜기 위해 세입자를 내쫓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사진은 한남동의 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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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없는데 쫓겨난다고 하니까, 얼마나 불쌍해…."
"집주인이 아예 세입자 안 받겠다잖아."

2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도깨비 시장. 허름한 주택가 골목에 들어선 이곳 시장에서 상인들은 시장 한편 텅 빈 손수레를 가리키며 안타까운 말들을 주고받았다. 며칠 전까지 채소를 팔던 한 할머니에 대한 얘기였다.

한 상인은 "근처에서 세 들어 살고 있는 할머니가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해서 전전긍긍했다, 지금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월세 가격이 올라서 그런 것이냐"고 묻자 "'그냥 나가라'고 한 모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가 궁금했다. 또 다른 상인이 "주거이전비 때문"이라며 "이곳의 많은 세입자가 겪고 있는 문제"라고 귀띔했다.

도깨비 시장을 포함한 용산구 한남·보광·이태원·동빙고동 일대는 한남 뉴타운지구에 속해있다. 향후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경우 발생할 세입자 주거이전비를 아끼기 위해 집주인들이 세입자를 내쫓고 있다는 게 시장 상인들의 설명이다. 용산구청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곳 1만8천여 세대 중 주거세입자는 1만4천여 세대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들은 '나 몰라라'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좁고 허름하지만 안락했던 보금자리에서 전세대란 한가운데로 내쫓긴 세입자들의 계절은 아직도 엄혹한 겨울이다.

쫓겨나는 재개발 지역 세입자... "전세대란과 고물가에 희망 없다"

한남동 49.5㎡(15평) 규모의 반지하 전세방에 살고 있는 이미현(가명·37)씨는 지난 1월 집주인으로부터 "임대차 계약이 끝나는 3월까지 집을 비워 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씨는 "전셋값을 올려달라는 얘기도 아니고, '집을 비워 달라'고 해서 황당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알아보니, 집주인이 향후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세입자에게 지급해야 할 주거이전비를 아끼기 위해 "집을 비워 달라"고 한 것이었다. 이씨 남편의 직장 때문에 주변 지역으로 이사를 하려고 했지만, 전세대란은 이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현재 이씨가 살고 있는 곳의 전셋값은 3000만 원. 이 중 1500만 원은 대출을 받은 것으로, 매달 10만 원 가량의 원금과 이자를 갚고 있다. 한남 뉴타운지구에서는 전셋방이 사라진 지 오래인 탓에 월세방을 구해야 한다. 그나마 찾은 보증금 2000만 원, 월세 40만 원인 월세방은 이씨에겐 부담스럽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하는 이씨는 "남편 월급 200만 원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월세 40만 원을 내면 저축은커녕 아파도 병원 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며 "물가가 크게 뛴 상황에서 우리 부부에겐 미래와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돈 못 벌고 집 못 산 내 탓만 하고 있다"며 "대출받으라는 전세 대책을 내놓은 정부가 원망스럽다"고 덧붙였다.

30대 초반의 김미정(가명)씨 역시 최근 집주인으로부터 "집에서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5년 넘게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그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그는 이 지역이 철거 단계에 들어서면,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전에 이 지역에서 쫓겨나면 그 혜택을 잃게 된다.

그는 "집주인은 세입자 주거이전비를 아끼기 위해 세입자를 내쫓지만, 이곳에 오래 산 세입자는 그마나 있는 세입자 대책인 임대아파트 입주 자격을 잃게 되면서 큰 어려움에 처한다"며 "정부의 무대책 탓에, 없는 사람만 더 불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일한 국토부와 손놓은 서울시, 세입자만 고통

 한남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뉴타운 청사진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한남 뉴타운지구로 지정된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뉴타운 청사진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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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을 앞둔 지역의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쫓는 일은 2009년 5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 개정되면서 나타났다. 재건축 조합이 세입자 주거이전비를 지급하도록 한 법 48조 5항이 개정되면서 조합 정관에 따라 집주인이 지급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주거이전비 지급에 부담을 느낀 집주인이 세입자를 내쫓게 된 것이다.

국토해양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보상금을 노린 위장 세입자 문제를 없애고, 전체 조합원의 분담금으로 주거이전비를 지급하는 것에 대한 세입자 없는 조합원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이 조항 개정을 국회에 요구한 것"이라며 "세입자 보호와는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국토부의 안일한 인식에서 이뤄진 법 조항 개정으로, 재개발 사업 추진 속도가 빠른 곳에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한남 뉴타운지구에서는 지난해 6~9월 5개 구역 중 4곳의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며 재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집주인에게 주거이전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담긴 임대차 계약서가 크게 늘었다.

 한남 뉴타운지구에서는 지난해 6~9월 5개 구역 중 4곳의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며 재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집주인에게 주거이전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담긴 임대차 계약서가 크게 늘었다.
 한남 뉴타운지구에서는 지난해 6~9월 5개 구역 중 4곳의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며 재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자, '집주인에게 주거이전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담긴 임대차 계약서가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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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3구역 조합설립추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곳 집주인들은 평균 세입자 3가구에 대한 주거이전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예상되는데, 수천만 원 수준"이라며 "세입자 안 받고 주거이전비를 안 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집주인이 많다"고 전했다. 4인가구 기준 주거이전비는 1300만 원~1500만 원이다.

설혜영 용산구의원(민주노동당)은 "당시 용산구청에서 부당한 계약서를 작성한 부동산 중개업소 단속에 나섰지만, 많은 집주인은 오히려 임대차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를 내쫓기 시작했다"며 "이곳 세입자들로부터 하루에도 여러 통의 전화가 오지만, 구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답답하다"고 전했다.

현재 서울시는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시 주택본부 재정비1과 관계자는 "계약 만료된 세입자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 집주인을 제재할 수 없지 않느냐"면서 "2010년 4월 조합원 교육 등을 실시했다, 세입자가 안타깝지만 서울시가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은 없다"고 밝혔다.

"세입자 내쫓는 법 재개정 필요... 주거이전비 청구권 도입해야"

재개발 지역에서 세입자가 내쫓기는 일은 도정법 48조 5항이 개정되면서 발생한 만큼, 이 조항의 재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국토부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국토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집주인이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 세입자 때문에 집주인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며 "세입자 보호에 대한 추가적인 대책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 '나눔과 미래'의 이주원 지역사업국장은 "국토부는 재개발 사업 진행 속도를 높이고, 세입자용 임대아파트 부족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도정법 48조 5항의 개정을 밀어붙인 것"이라며 "이 때문에 많은 세입자가 내쫓기고 있는 만큼, 세입자를 위해 이 조항이 재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재개발 지역에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주할 경우, 주거이전비를 재건축 조합 등에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길만이 재개발 지역 세입자 보호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세대란#주거이전비#도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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