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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님이다.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김대중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님'이었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 대통령 '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전두환 대통령 각하….

한자말인 '각하(閣下)'는 본디 고급 관료를 높이려고 직함 뒤에 붙였던 말이다. 당연히 대통령한테만 썼던 건 아니다. 사령관 각하, 국회의장 각하 등…. 그런데 본디 뜻과 달리 이 말이 대단히 권위적이어서 김대중 대통령은 '각하' 대신 '님'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던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 '각하'들은 연설을 할 때 자신을 꼭 '본인'이라고 했다. '본인은 이 나라 경제부흥을 위해…', '본인은 북괴의 어떠한 도발도…', 어쩌고저쩌고 했던 것이다. 이걸 '나는'으로 바꿔 쓰기 시작한 때도 '국민의정부'가 처음이었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세를 더 낮춰서 '저는'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본인(本人)'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하나는, '어떤 일의 주체인 그 사람'을 가리킨다. 3인칭으로 쓰이는 이 말은 '당사자(當事者)', '자기(自己)', '자신(自身)' 등과 뜻이 거의 같다. '본인의 생각을 물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당사자만 모르고 있다'와 같은 식으로 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를 문어체(文語體)로(실제로는 대단히 거만한 태도로) 이르는 말이다. 1인칭으로 쓰는 이 말을 한자어로 바꾸면 '오인(吾人)'이다. 저 역사적인 '기미독립선언문(己未獨立宣言文)' 첫머리의 '오등(吾等)은'의 뜻이 '우리는'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우리말의 대략 70%는 한자어다. 이 한자어도 두 종류가 있다. 순우리말로 바꿔 쓸 수 있는 것과,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말이 그것이다. 순우리말로 바꿀 수 있는 한자어는 대개 어렵거나 생소하다. 반대의 경우는 그야말로 순우리말처럼 쓰인다.

'본 장소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는 자는 필시 색출해서 책임을 묻겠습니다'라고 쓴 팻말을 가정해 보자.

이 문장에서 '본(本)', '장소(場所)', '무단(無斷)', '투기(投棄)', '자(者)', '필시(必是)', '색출(索出)'은 우리말로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는 어렵거나 생소한 말이다. '연탄(煉炭)'이나 '음식물(飮食物)', '책임(責任)'은 순우리말처럼 쓰는 한자어다. 이 문장을 다듬어 쓰면, '이곳에 연탄재나 음식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은 반드시 찾아내서 책임을 묻겠습니다'와 같이 된다.

좋은 우리말을 놔두고 굳이 어렵고 생소한 한자어 쓰기를 즐기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필히 허락을 득한 연후에 입실하시오', '목전에 당면한 애로사항을 숙지해야 한다', '해결이 불가하거나 지난할 거라고 사료됩니다'와 같은 식으로 쓰거나 말하는 것이다. 유식한 체를 좀 하고 싶어서 그럴 수는 있겠다. 

공항 매표소 앞 표지판
 공항 매표소 앞 표지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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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발견한 어느 표지판에 '지방으로 가는 승차권 환불시에는 수수료가 발생합니다. 매표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다. '지방', '승차권', '환불', '수수료', '발생', '매표', '유의' 같은 말은 거의 우리말처럼 쓰인다. 그런데 '환불시'와 '매표시'의 '시(時)'는 경우가 좀 다르다. '환불시'는 '환불하면'으로, '매표시'는 '매표할 때'나 '표를 살 때'와 같이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음식점 출입문에 적힌 '위치한'
 어느 음식점 출입문에 적힌 '위치한'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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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쇠 입점
 고로쇠 입점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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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패스트푸드점 출입문에 적힌 '왼쪽에 위치한 정문을 이용해주세요!'에도 이런 잘못된 습관이 들어 있다. 굳이 '위치한'이라고 쓰고 싶었을까 싶다. 그렇게 써야 하는 무슨 중요한 까닭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좀 궁금하다. 혹시 '왼쪽에 있는 정문'이라고 쓰면 매장의 품격이 떨어질지 모른다고 염려한 건 아닐까.

'고로쇠 입점 장소 지하매장'은 또 무슨 뜻이겠는가. 여기 적힌 '입점(入店)'은 한자말 그대로 어느 점포(매장 혹은 가게)에 '있다' 혹은 '들여 놓았다'라는 뜻일 것이다. '입점' 대신 좀 쉬운 한자말로 '판매'라고 쓰면 왜 안 되는가.

이쯤되면 한마디 덧붙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작금'에도 어려운 한자말을 쓰면 혹시 남들에게 유식해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 '다수'가 '도처'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심려'되는 바가 '지대'할 수밖에 없지요."


태그:#한자말, #순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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