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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때가 좋았는가? 사람들은 다시금 그 시절을 원하는가?

몇 해 전에 보수 언론으로부터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있더니 이번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동경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움직인 가장 위대한 인물 1위로 박정희를 꼽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어찌 보면 절대권력으로 배고픔을 없앤 그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한쪽 면만을 보는 크게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왜 지금 이 시대에 박정희인가?

물론 긍정적인 면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가 남긴 부정적인 면은 하나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건 정치, 사회적 전환 국면이 다가오면 기득권 방어에 민감한 수구세력들의 지나간 시대에 대한 예찬이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에겐 일제 때도, 이승만 때도 박정희 때도 태평성대였던 바, 머지 않아 전두환, 노태우 시기 및 김영삼 시기 또한 태평성대였노라는 그들의 주장을 틀림없이 듣게 될 것이다.

'박정희 미화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서 어떤 뚜렷한 논리를 찾아내기 어렵다. 그저 '그때가 좋았다'는 식의 향수나 '그 분은 뭔가 달랐다'는 식의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논리화할 수 없는 느낌이 열병처럼 번진다는 것은 분명 건전한 사회의 징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구체적 평가 기준도 없이 그저 현실에 대한 불만을 과거에 대한 향수로 귀착시키는 것은 시민사회의 미성숙을 드러내 보여주는 징표일 뿐이다.

어떤 정신과 전문의는 이런 현상을 '우리 국민들 사이에 카리스마적 권위에 기대고 싶은 의존 심리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한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고, 정치제도적 민주화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의식구조는 민주화에 걸맞는 것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국민들은 정치인의 수준이 낮음을 탓하지만, 좀 심하게 말하면 나라마다 그 국민 수준에 맞는 정치가를 가졌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몇 년 전에 나온 DJ DOC의 노래대로 정치인들은 완전히 우리를 가지고 노는데도 정작 그들을 투표를 통해 걸러내지 못한다.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투표 때가 되면 '미워도 다시 한번'이니 '대안이 없느니', '검증이 되지 않았느니(언제 기회나 줘봤나?), '우리가 남이가' 어쩌구 하면서 그들을 찍어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그렇게 욕을 먹는 김영삼 대통령의 초기 개혁에 대해 국민들이 높은 지지를 보낸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개혁이 국민들의 카리스마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재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박정희 현상은 한보사태와 IMF 등으로 청와대의 권위가 일거에 무너지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권력 의존욕이 되살아나면서 의지할 대상으로 과거의 인물을 들춰낸 것일 것이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대통령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오늘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의 뿌리는 어찌 보면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이제 막 자리잡아가고 있던 민주주의의 싹을 자른 데서 박정희 정권은 시작했다. 성장만 중시했던 정부 주도의 개발정책은 오늘날 대기업 위주의 경제상황과 정경유착, 부실공사의 폐해를 낳았고, 강권통치로 영구집권을 획책하여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고, 안보를 정권유지에 이용했으며, 선거 때마다 지역간의 감정에 골을 더 깊게 만들었다.

'온갖 특혜로 살찐 몇몇 재벌에 운명을 내맡긴 국민경제, 뿌리내린 정경 유착,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의 끝없는 희생, 이들과 함께 파괴된 기술기반과 국내시장이 90년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현실은 박정희식 개발정책의 다른 얼굴이다.

불균형 성장으로 골병이 들었는데 경제를 살렸다니 무슨 말인가'라고 하는 혹평은 실은 제대로 된 현실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급속한 경제 성장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성공적인 토지개혁, 미국의 한반도 정책 변화,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 경제 개발 의지 등의 중요한 요인을 간과할 수는 없으며, 이는 다른 사람이 했어도 다른 형태의 경제발전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시각에선 무엇보다도 경제발전의 최대의 공로자로서 장미빛 미래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산업역군들의 진한 땀과 삶의 고통이 전혀 읽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평가대로 과연 그가 민족주의자인가?

그는 일본군 사관학교를 나와 관동군이 되어 독립군 사냥을 했던 사람이며, 여순 반란사건에 가담했다는 유력한 설도 있으며, 5.16은 강제예편에 앞서 모험을 걸었던 지극히 개인적이었고,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다.

이처럼 일제하 경력이나 한일회담 과정, 그리고 핵개발에서 나타난 박정희의 태도를 민족적이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강력한 자존심과 의지를 지닌 독재자가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위해 때로는 친일도 불사하고, 때로는 미국에도 저항할 수 있는 고집과 독선이 있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남한의 발전뿐만 아니라, 북한까지도 배려하는 민족 전체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는 원대한 구상도 없었고, 그럴 아량도 없었다. 독재자의 성격적 특성을 민족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탁월하고도 위대한 리더십 뒤에는 독선적인 아집과 죽음의 피냄새가 숨겨져 있다.

박정희 미화작업은 김영삼 정권에서 잔당으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한 유신세력을 비롯하여 권토중래를 노리는 3, 4, 5, 6공 세력, 그리고 군사독재의 핵우산을 그리워하는 대기업 등 수구진영의 기대를 업고 있다.

그런데 IMF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고, 일반 국민들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예찬이 먹혀들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유도하는 증언의 홍수가 과거 수혜자들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망각이라는 묘약은 과거의 끔찍한 기억조차 아련한 추억으로 변질시키며 사람들을 한없이 관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언제까지 잔재주로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어찌 정치인들만의 문제랴? 국민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한국사람들은 '난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불행한 일은 나한테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홍세화 씨는 한겨레 신문 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의 박정희 찬양 움직임은 수구세력과 이에 편승하는 일군의 문사 프로피퇴르(이익을 챙기는 자)들, 그리고 불만스런 현실을 미래 지향으로 개선시키려는 의지도, 전망도 없는 회고파들의 합동 작품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 죽이는 기술도, 고문하는 기술도, 부패의 수법도, 독재체제의 유지 방법도 끊임없이 축적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비극이며, 우리가 단 한순간도 사회 비판과 투쟁을 게을리할 수 없는 이유이다.

광주의 학살도, 삼청교육대도 박정희 일인독재체제의 앵톨레랑스를 토대로 일어난 것이다. 삼풍이나 성수대교가 어제 오늘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계량적 실적 위주의 성장 철학이 빚은 와우의 연장이며, 나랏돈, 은행돈, 대기업의 돈이 곧 내 돈인 현상의 한보 사태 등도 박정희 시대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개발독재와 정경유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오늘 한국사회에 만연한 황금만능주의, 인명경시현상도 그 시대, 인권을 마음껏 우롱하며 침묵을 강요하면서 사회정의를 땅에 떨어뜨린 영향이다.

그뿐인가? 국가보안법에, 안기부의 밀실에, 감옥에, 권력의 시녀가 된 언론에, 그리고 인권과 노동권, 시민사회운동을 탄압하려는 각종 장치 속에 그의 독기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런데?! 그를 찬양하는 소리가 들린다. 억울한 죽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한, 눈물, 고통, 가슴답답함, 탄식과 절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찬양하는 노래소리가 들린다. 나는 알고 있다. 약자의 고통과 탄식에 연대하는 대신 그것들을 짓밟고 찬양가를 부를 수 있게 된 인간성의 실추, 그 뻔뻔스러움, 염치없음 역시 박정희와 그 시대의 강자의 논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경제개발을 박정희 대통령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민정부 탄생과 민주화를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모두 국민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공은 아니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좀더 객관적인 평가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의 정치관행을 끊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차후로 그런 관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를 개혁했어야할 김영삼 대통령은 그러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제 그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큰 기대는 할 수가 없다. 이미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판을 보면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거짓말을 일삼던 양치기 소년, 그의 마지막 진실을 믿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늑대의 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양치기 소년의 말을 믿지 않은 마을 사람들의 잘못인가?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다가도 '이번엔 진짠데 국민들이 믿지 않아 답답할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치판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한다. 정말 늑대가 나타났을 때만 이야기를 해준다면 사람들은 늑대를 물리쳤을 것이다. 여러 위기 상황에서 진실만을 얘기해 줬으면 국민들은 적극 협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십번 속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속아온 것이 분통터져 그깟 놈의 정치판 깨지면 어떠냐고 말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또 속아야 한다. 여긴 그들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위기극복을 위해 또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리고 이 위기를 넘기면 정치인들은 아마 또 그들의 공으로 돌릴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이 생각난다.

'거리의 민중이란 키케로의 말대로 무지할지는 몰라도 진실을 꿰뚫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난 이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좀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난 참 비겁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 이런 글을 쓰고, 안심하고(?) 있을 사회는 못되지만,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와 YS는 많은 부분에서 닮았었고, 어떤 면에선 DJ도 닮는 면이 많은지도 모른다. 어쩌면 맞고 자란 아이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폭력을 택하듯 그것을 그대로 배웠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이 글을 쓰면서 더 답답해지고, 눈에선 눈물이 흐르는 건 왜일까? 왜 지금 박정희에 대한 글인가? 할진 몰라도 아직도 그의 독기가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정치인도, 그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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