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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에르토리코....
미국 플로리다와 베네주엘라 북쪽의 한 섬으로 하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멀지 않은 곳, 한반도의 약 1/20의 크기로 면적은 8900㎢.
프에르토리코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며, 농사짓기에도 비옥한 땅과 수려한 산과 계곡, 항상 따뜻한 기후와 맑은 날씨로 많은 사람들이 휴양지로 찾아오는 곳이다.

이처럼 아름답게만 생각되는 곳이 또 다른 이유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프에르토리코에도 우리나라의 매향리같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카리브해의 비크섬(Vieques)이라는 곳에서 미해군의 폭격훈련반대 및 해군훈련지반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다.
작년 4월, 섬 관재소에 미군의 폭탄이 오폭되면서 관재소 경비원인 데이빗 산즈가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미해군의 폭격을 반대하는 시위와 투쟁은 계속되어져 왔다.
프에르토리코는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이후 미국이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후 자치령이라는 이름 아래 미국의 식민지로서 존재해왔다. 제 2차 세계대전당시 프에르토리코 비크섬에 미해군이 처음 도착한 이래로 해군과 주민들 사이에 많은 갈등의 역사가 쌓여왔다. 카리브해에 위치하고 있음은 물론, 미군에게 있어 비크섬만큼 훈련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전략상 비크섬은 육지훈련, 해상훈련 및 비행훈련까지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1석 3조의 조건을 갖춘 곳이며, 다른 곳은 아무리 물색을 하여도 비크섬같은 곳은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 미해군의 입장이다.

비크섬을 둘러싼 문제가 커지자, 당황한 클린턴 정부는 99년 12월 3일,
- 실탄 훈련 즉각 중지
- 실탄을 사용하지 않는 훈련을 내년 봄에 재개
- 5년 내 훈련장 사용 중지

라는 파격적인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미해군 및 보수의원들로부터 너무 양보를 한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받아야만했다.

하지만 프에르토리코인들이 원한 것은 단지 일시적인 훈련정지, 단지 일시적인 실탄사용금지, 혹은 5년 동안만 참으면 되는 폭격훈련이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고, 즉각적인 해군훈련중지 및 비크섬반환을 더 강하게 촉구했다. 아름다운 해변, 비옥한 농토, 평화로운 바다, 인간다운 삶.
이런 것들이 프에르토리코 주민들이 그토록 돌려받고 싶어하는 가장 절실한 생존조건인 것이다.

폭격훈련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단 프에르토리코인들만이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과 미 상원의원인 찰스 스쿠머(Charles Schumer)는 비크섬훈련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으며, 각 언론사 및 신문들도 활자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비크섬에 대한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또한 프에르토리코의 수도인 산 후앙(San Juan)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라틴 팝 가수 리키 마틴(Ricky Martin)도 비크섬의 폭격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Mtv 웹사이트에 따르면, 리키 마틴은 <엘 몽드>지에 "푸에르토리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로 결합했으며, 나 또한 그 결합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비크섬은 단지 카리브해의 작은 섬이라는 것에서 떠나, 미국의 해군이 훈련을 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미국인들도 환경과 인권을 위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세계인들도 역시 클린턴 정부가 이 문제를 얼마나 잘 해결할 것인지, 프에르토리코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미국으로부터 독립까지 하는 것은 아닌지 촉각을 세우고 있다.

비크섬문제가 이렇게 큰 이슈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까지, 미정부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며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기까지, 그것은 대다수 프에르토리코인과 비크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울고 있지 않은데 눈물을 닦아줄 리도 없고, 피를 흘리고 있지도 않은데 붕대를 감아줄 리도 없다. 프에르토리코인들은 오늘까지도 단결된 모습으로 비크섬에 끝없는 관심을 쏟아붓고 있다.

비크섬에는 약 9천명이 거주하고 있지만, 1995년 비크섬에 군 송신기를 설치하려는 미군에 항의하는 시위에는 프에르토리코인 6만명이 몰려들었다. 또한, 지난 2월에는 십만여명이 미군철수를 위한 대규모 시위에 참가했다. 즉, 비크섬은 비크섬에 있는 섬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프에르토리코인 모두가 풀어나가야 할 '민족'의 과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에르토리코의 각 언론사들도 지면을 통하여 비크섬뉴스를 중점있게 다루고 있으며, 미해군의 폭격을 반대하는 인터넷사이트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일반 시민뿐만이 아닌, 정부관료와 학자들도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등, 비크섬을 보호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너무도 뜨겁고 절실한 것이다.

19일부터 폭격이 시작된 매향리에서 매향리 주민들과 매향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투쟁이 한창이다. 그들의 투쟁은 정치적인 이유도 아니며, 강렬한 반미사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프에르토리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위해서 싸우고 있으며, 매향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 적어도 인권과 환경을 생각한다면, 같은 한국이라는 땅덩이에 사는 우리들 모두 매향리에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싸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투쟁이 미군철수를 위한 '최후의 목표'가 아닌, '한국인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 라도 될 수 있도록 작은 관심을 가져 주길, '같은민족'이라는 어설픈 이름을 불러내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호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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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크섬에서 일어난 주요사건들을 연대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41년 3월 17일 : 미해군은 52평방마일 면적의 비크섬 3/4을 몰수, 섬 인구의 반을 강제로 이동시키면서 3천5백만달러를 써서 비크섬에 훈련용 운동장 및 부대를 건설했다. 미해군이 착취한 토지는 섬의 주용농작물인 사탕수수및 기본농업용 농토로 사용되어온 땅이었으며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1947년 : 비크섬 노동자들의 몇 년 동안의 저항 후에, 미내무성에서 비크섬이 완전히 군사용 훈련섬이 될 수 있도록 섬 전체인구를 세인트 크로엑스(St. Croix)라는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이 들어있는 비공식 서한을 내놓았다.

1961년 : 케네디대통령과 국방부는 비크섬의 지방자치제를 폐지하고 섬전체가 미해군에 종속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지방정부와 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취소되었다.

1971년 : 프에르토리코 독립당 루반 베리어스총재를 비롯한 12명의 사람들이 미해군을 내보내기 위한 시민불복종을 실천하기 위해 쿨레브라와 이웃하고 있는 섬자치 미해군부대에 무단으로 들어간 후 체포되었다. 두명은 연방법원에 의해 6개월형이 선고되었다. 체포를 넘어서 이 사건은 프에르토리코정부를 이 일에 포함시키게 하였으며, 해군은 1975년에 쿨레브라를 떠났다.

1978년 : 비크섬의 어부들과 주민들은 그들의 조그만 낚싯배를 가지고 군사훈련을 막았다. 해군이 어부들의 어업활동을 군사훈련이라는 이유로 엄격히 제한했으며, 훈련으로 하는 폭발등이 바다생활에 큰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어부들은 후에 해군훈련이 바다환경등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중지시켜야 한다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980년 : 비크섬의 해군활동을 조사한 법원은 해군이 비크섬을 떠나야하며 해군훈련과 폭격연습장으로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3년 : 카를로스 로메로 바쎌로장관은 소송을 조정하고 섬의 경제발전을 위한 원조 및 환경을 보호하겠다는 해군의 청원을 받아들여 해군과 협정을 맺는다.

1993년 : 해군조종기 F/A-18 호넷제트기가 비크섬에 있는 이자벨 시군다로부터 약 1마일 떨어진곳(목표지점에서 섬쪽으로 10마일 떨어진)에 5개의 500파운드 폭탄을 떨어뜨렸다. 4개는 폭발했으나 다섯번째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1995년 : 프에리토리코의 본섬으로부터 남서쪽에 있는 라자스라는 곳에 수신기를 설치하고, 비크섬에는 송신기 레이더를 설치하려는 해군의 계획에 저항하는 60,000명의 행진이 수도인 산 후앙(San Juan)이라는 곳에서 있었다.

1997년 : 4대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전투함이 어머니의 날에 선베이 공공해변에 선착했다. 몇십명의 어부들이 그들의 조그만 낚싯배에 올라 선함의 선원들과 격렬한 저항을 했다. 선원들은 그들의 금속물건을 집어던지고 어부들의 조그만 낚싯배에 호스로 물길을 껴얹었으나 결국 선착한지 두시간만에 떠났다.

1999년 : 두개의 제트기가 500파운드의 폭탄을 폭격훈련동안 떨어뜨렸다. 하지만 목표물을 3마일이나 지나가 발사됐으며, 그 중 한 개는 섬 관재소의 기둥에 오폭되고, 관재소 경비원인 데이빗 산즈 로드리게즈가 사망, 4명이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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