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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에서 다시 만난 동수는 많이 즐거워 보였습니다. 물놀이 갈 생각에 조금은 흥분한 듯도 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서른 명쯤의 아이들이 교실에 가득 앉아 있었는데 정말 신기한 것은 뒷통수만 보고도 우리 동수가 어디쯤에 앉아 있는지 한눈에 탁 알 수 있었단 사실입니다. 동수도 웅성대는 사람들 틈에서 나랑 눈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사흘 동안 함께 지낼 일을 생각하자 저절로 행복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가족 이름을 불러 드릴께요”
평마 선생님께서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일이 그렇게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몰랐습니다. 저는 동수와 또 다른 아이 곽혜정이란 4학년 아이와 가족으로 엮어졌습니다. 이름이 불리운 후 잠시 동수 얼굴을 보았는데, 생각했던 대로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가족 이름을 부르자마자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는 혜정이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았습니다.

예쁜 여자 아이였습니다. 동수랑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재잘재잘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혜정이는 너무 예쁜 아이였지만, 하지만, 저는 또 다시 저만치 도망가서 제 곁에 오지 않는 동수에게만 마음이 쓰였습니다. 거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아무 상관도 없었던 아이였고, 날 힘들게 하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우리 동수는 이미 저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던 겁니다.

동수는 다시 나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혜정이를 보고는 난데없이 “도둑놈!”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도둑놈이니까 도둑놈이라고 하지!”하고는 입이 뾰루퉁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날 보지도 않고 “가족 바꿔 달라고 할 거예요, 저, 다른 데 갈래요, 혜정이 싫어요”하고는 저만치 구석에 가서 가방을 껴안고 앉아 버리더군요. 이런, 낭패가 있다니요.

혜정이는 무슨 일인가 하고, 또 저만큼 서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고, 동수나 혜정이만한 때를 보냈고 엄마에게 이유도 없이 떼를 쓰기도 했지만, 엄마가 그 때 내게 어떻게 해 주었는가는 전혀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머릿 속이 하얗기만 했습니다. 급기야 동수는 다른 아이들이 전부 강가로 물놀이를 가는데도 따라나서질 않았습니다. 내가 가서 말을 걸어도 외면하기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두려웠지요. 동수를 잃는 것이, 그리고 이제야 겨우 사랑하고 사랑받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던 동수에게 또 다시 상처를 주는 사람이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했고, 선생님께 찾아갔습니다. 가족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혜정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혜정이랑 동수는 학교에서도 같은 반이었고 게다가 짝이라고 했습니다.

집에서고 학교에서고, 거기다 가족으로 맺어진 사람에게서까지 같이 엮여서 다니는 일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곤혹스러운 일일 것 같았습니다. 동수랑 같은 방에서 지내는 호철이란 남자애랑 혜정이를 바꾸어 가족으로 삼았습니다. 원래 호철이의 가족이었던 아저씨는 다행히 우리 사정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동수는 아무래도 그런 상황이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요. 자기가 선택할 수도 없는 가족이란 거,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것도 화나는 일인데다 어른들 멋대로 짝을 짓고 연결하고 하는 것이 맘에 안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겠지요. 호철이는 신이 나서 물놀이를 갔고, 동수랑 나는 둘이서만 그 너른 운동장에 덩그러니 앉았습니다. 매미 소리는 귀가 따갑도록 머리 위에서 울려대고 있었고, 우리는 말없이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시이소에서 오락가락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화가 식지 않는지, 저만치 혼자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동수가 소리칩니다.

“가요! 왜, 물놀이 안 가는 거예요! 가란 말예요!”
“동수가 안 가는데 나 혼자 어떻게 가니?”
“혜정이 있잖아요. 혜정이 갔는데 왜 안 가요!”
동수 마음 먼저 생각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물어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지요. 그리곤, 혜정이랑이 아니라 호철이가 우리 가족으로 맺어졌다고 얘길 했습니다. 하지만, 믿질 않더군요.

“이제, 우리 가족 아니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우린 이제 가족 아니잖아요!”
“아니야, 우린 똑같아.”
“아니예요! 선생님은 이제 혜정이 가족이잖아요!”
그 마음을 어떻게 어루만져야 할지, 그 상처를 어떻게 메워 줘야 할지 캄캄했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를 속상하게 하던 동수는 그래도 물놀이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했는지 뙤약볕을 걸어 물놀이하는 강가까지 결국은 찾아갔습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놀았습니다. 혜정이가 원래는 호철이의 가족이었던 아저씨와 더불어 즐겁게 놀고 있는 걸 확인했던 거지요. 우리의 위기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곤 이제 대단원이 남아 있는 셈인가요?

새로이 가족이 된 호철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입니다. 저는 이제 또 숙제를 하나 안게 됐습니다. 내년 봄이면 아버지를 따라 떠나간다는 내 새로운 가족 호철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과, 그 와중에도 우리 동수가 상처받지 않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입니다.

사흘 동안 금산에 머무르면서, 같은 방에서 지내는 중학생이랑 싸우다 삐져서 저녁을 굶으려는 호철이를 달래기도 하고, 가족의 발자국을 지점토에 새겨서 발바닥 액자를 만드는 시간에 괜히 심통을 부리는 동수 덕분에 물이 찍찍 배어나는 엉망인 지점토를 부둥켜안고 씨름해야 하기도 했고, 샌달 끈이 떨어졌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찾아보지도 않고 냇가에서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울상을 짓는 동수를 달래야 하기도 했고, 어쨌든 참 부산하고도 낯선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 시간은 저 혼자 날개를 달고 저만치 날아가기 시작할 거란 사실과 그 시간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왔다갔다 오가게 될 것이란 사실입니다.

일정을 모두 끝내고 버스로 대전까지 가는 동안, 아이들은 죽은 듯이 잠을 잤습니다. 지난 시간이 녀석들에게도 피곤한 날들이었던 게지요.

조금씩 비가 내리는 평마 마당에서 아이들과 작별했습니다. 호철이는 가방을 털썩대며 벌써 들어가 버렸고, 동수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자기네 방에서 금산까지 들고 오간 이불 보퉁이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말이죠. 다른 아이들이 다 들어갔는데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도 모르게 동수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잠시 비칠대며 버둥대더니 동수도 잠잠합니다.

지난 1년 간 동수는 알게 모르게 저를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녹녹하게 가슴을 녹여 주었나 하면, 남의 등을 보면서 걸어가야 하는 이의 아픔을 내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감사함을 가득 담아 동수를 껴안아 봅니다. 우리는 또 그렇게 잠시, 이별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내 어린 연인, 동수의 생일입니다. 8월하고도 20일이지요. 어떻게 축하해 주면 좋을지 저는 벌써부터 걱정이랍니다. 그래도, 불안하진 않아요. 우리 동수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저를 만나고 싸우고 토라지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커갈 테니까요. 저와 더불어, 함께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평화의 마을’아이들과 친구가, 가족이 되고 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042-633-8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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