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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아침 7시 37분, 북쪽 상봉단이 워커힐 호텔 앞 주차장으로 나오자 여기저기 외침이 들렸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오빠-. 여기요!"
"큰아버지, 여깁니다!"

민정순 씨는 연신 오빠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고, 오빠 민재근 씨는 "잘 살라우, 잘"이라고만 되풀이 말했다. '오빠, 안녕히 가세요'라는 큰 글씨를 준비한 방순자(63)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버스까지 큰 오빠 방환기(68) 씨를 찾아 뛰었다.

워커힐호텔 앞은 8대의 중앙고속 버스를 가운데 두고 온통 여기저기 부퉁켜 안은 눈물 뿐이었다. 남과 북은 그렇게 마지막 이별의식을 치뤘다. 50년의 한을 풀려는 듯이 요란하게.

마지막 이별의식에서는 '상봉 인원 5명 제한'도 필요없었다. 두줄의 경찰이 늘어서 만들어낸 3, 4미터 사이의 공간에 가족들은 모두 들어갔다. 5명이 아니라 7명, 10명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18살이던 아들 강영원 씨는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말만을 남긴 채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북에서 교수가 되어 어머니 박보배 씨 앞에 나타났다. 아흔한살의 어머니는 헤어짐이 아쉬워 아들의 손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겨우 어머니를 달래고, 아들은 너무도 가벼워진 어머니를 등에 업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76세 서병돈 씨의 마지막 말. "항상 아쉽고, 우리가 생전에 다시한번 만날 날이 있을지..." 솔직한 말이었다. 그곳을 지켜보던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1세들에게는 살아생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붙잡은 주름진 손들은 더욱 떨어지기 힘들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8시가 조금 넘으며 적십자원과 경호원들이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와 하나둘씩 조심스레 북쪽 상봉단을 데려갔다.

북쪽 상봉단은 한 명 한 명씩 차에 올라탔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에 비해 비교적 감정을 절제하던 북쪽 방문단도 버스가 움직이자 모두 창문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붉게 충혈된 눈을 한곳에 고정시킨채 연신 손을 흔들어댔다.

마지막 버스가 나간 시각은 8월 18일 아침 8시18분. 8월 15일 오후 4시41분 부터 8월 18일 아침 8시18분까지. 50년의 세월을 휘돌아 힘겹게 만난 63시간 37분은 그렇게 모두 끝났다.

관련기사 : 8월 17일 마지막 상봉을 마치고 나오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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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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