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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나무라는 노인과 그런 노인을 계단에서 발로 찬 중학생.

지하철의 <노약자·장애인 지정석>을 둘러싼 우발적인 사건으로 한 노인이 목숨을 잃었고, 한 학생은 구속될 처지에 놓였다.

서울 남대문 경찰서는 9월 15일 오후 1시께 중학교 3학년인 이모(15) 군에 대해 폭행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군은 지난 9월 13일 저녁 7시께 지하철 시청역 1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계단위에서 염모씨(77)를 뒤에서 발로 밀었다.

연로한 염씨는 계단을 10미터 정도 굴러 혼수상태에 빠졌고 9월 15일 새벽 3시 20분께 사망했다. 사망진단서에 적힌 사인은 '두개골 골절'. 대체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관련기사 1 : 중학생들이 본 노약자석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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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해서 벌인 행동이 폭행치사로

15일 오후 서울 남대문 경찰서 소년계 사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마른 체격에 뽀얀 피부의 한 소년이 피의자 자리에 앉아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한눈에 사건 당사자인 이군임을 알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한 중년 남성이 초췌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기자들이 이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며 "모두 나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다. 이군의 아버지였다.

경찰과 이군 아버지에 따르면 사건경위는 이렇다. 9월 13일 이군은 어머니와 3살짜리 동생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성북역에서 부평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군 가족은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다. 시청역에 도착하기 몇 정거장 전에 나이가 많은 염씨가 같은 지하철에 탔고 이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양보로 자리에 앉았다.

사고가 일어났던 시청역 환승 계단 ⓒ 오마이뉴스 이병한
염씨는 모두 들으라는 듯이 뭐라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는 욕설도 섞여 있었고 대략적인 내용은 '요즘 애들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 염씨는 이군 맞은 편에 앉아 그런 말을 두세 정거장을 가는 동안 계속했고 이윽고 시청역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군이 갑자기 염씨를 쫓아내렸고 어머니는 미처 말리지 못한 채 지하철은 떠났다.

이군은 염씨에게 쫓아가며 "저에게 욕을 하신 겁니까"라며 따졌다. 염씨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다가 계단 앞에서 "너 나 알어? 나 80이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군은 염씨를 발로 밀었다. 왜 밀었냐는 형사의 말에 이군은 "욱해서"라고 답했다고한다.


쾌활한 성격을 가진 아주 평범한 학생

법적으로 따지면 이군은 매우 불리하다. 자신을 비난하는 노인에 대해 지하철 안에서 반박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다가 따라 내린 후 발로 밀었기 때문이다. 죽이겠다는 의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최소한 법적으로는 폭행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는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경찰은 난감한 표정이다. 남대문 경찰서 허창송 소년계 계장은 "법리적으로 따지면 죄질이 매우 나쁘지만 인간적으로는 안타깝다"면서 "그는 초범인데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착실했다"고 말했다. 담당형사인 조성우 경사는 "무심코 한 행동이 너무 커져 버렸다"고 말했다. 전례가 없는 이번 사건은 누구의 죄라기보다는 현 세태를 반영한다고 소년계 형사들은 입을 모았다.

형사들이 느끼는 이군에 대한 평은 담임선생님의 말과도 일치한다. 부평 B중학교의 담임선생님은 이군이 "전혀 문제학생이 아닌 평범한 학생"이라고 말했다. 이군의 성적은 반에서 중간정도. 내성적인 성격도 아니고 소위 '왕따'를 당해보지도 않았다고 교사는 밝혔다. "좀 '욱'하는 성격인가"라는 질문에 교사는 "요즘 애들은 다 그렇다"고 말했다.


아들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 오마이뉴스 배을선
피해자인 염씨는 사고 이후 줄곧 혼수상태에 있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이번 사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지하철에서 뭐라고 했는지, 왜 그랬는지, 심정이 어떤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염씨의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다. 그는 기자에게 "학생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선처를 하겠다는 것이냐"는 질문에 "아직은 모르겠다, 지금은 장례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가해자인 이군과 그의 아버지는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이군의 구속영장 청구 서류가 완성되고 이군이 유치장에 들어가자 줄곧 아들과 함께 있던 아버지는 곧바로 염씨의 시신이 있는 강북삼성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상주인 염씨의 아들을 보자마자 병원 로비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모든 죄는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지하철에는 지금 이 시간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 한칸에 12자리인 노약자·장애인 지정석에 자꾸 눈길이 갔다. 저 자리로 인한, 어찌보면 사소한 사건으로 한 노인은 안타까운 생명을 잃었고 한 젊은이는 밝은 미래를 잃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62세의 백청석 씨는 노약자 석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 자는 척하고 대부분 일어나지를 않아. 뭐 그렇다고 양보만 하면 될 자리를 비워놓을 것까지는 없지만, 노약자석이든 넓은 자리든 양보는 다 필요한 거야."

ⓒ 오마이뉴스 배을선
지하철 4호선. 비어 있는 노약자석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교복을 입은 3명의 여학생들이 앉으려는 순간 "여기, 노약자석이라 비워놓아야 하는데요"라고 말하자, 기가 막힌 듯 쳐다본 후 옆 칸으로 가버렸다. 대학생 이지현 씨(22)는 "진심으로 비켜드리려고 해도, 기분 상한 말씀까지 하시면서 사람 많은 곳에서 창피를 주시는 분들에게는 비켜드리고 싶지가 않다"고 말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는 무수히 많은 77세 염씨와 중학생 이군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밀고 당기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9월 15일 신청한 이군에 대한 구속영장은 9월 16일 밤늦게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이군은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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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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