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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3일 새해 인사차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의 집을 방문하려던 일정이 연기되었다. 이 총재가 '의원 임대' 사태 이후 청와대 영수회담 참석문제를 놓고 고심하느라 부득이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한나라당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다른 사람은 다 세배를 왔는데 이 총재가 이를 연기한데 대해 상도동측에서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다.
이회창과 김영삼. 돌아보면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문민정부 전반기에 감사원장 이회창을 총리로 발탁한 것이 김 전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회창 총리는 총리의 권한을 제한하는 김 대통령에 반발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했던 그에게 김 전대통령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다시 손을 내밀었고, 이회창씨는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15대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화해도 잠시, 15대 대통령후보가 된 이회창 총재는 김 전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고, 3김정치와의 성전을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관계악화의 원인제공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만, 정치무상(政治無常)을 느낄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어 왔다.
두 사람의 기구한 인연은 15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도 계속되었고, 마침내 16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는 지금까지도 복잡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회창 총재는 그동안 때때로 상도동계의 이탈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으며, 차기 대선을 의식하여 가급적 김 전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해왔다.
그러나 이 총재를 향한 김 전대통령의 독설은 점점 심해만 갔다. 김 전대통령은 이 총재에 대해“신의도 없고 정치력도 없으며 대통령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고,“다음 대선에서 그를 지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급기야는“그 사람이 지난번(97년 대통령선거)에 상의도 없이 나에게 탈당하라고 하고, 신문에 내 욕을 했다. 그것은 배은망덕이고 인간이 아니다”라는 비난까지 해댔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원내 제1당의 총재에게 인간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그야말로 갈데까지 간 셈이다.
이쯤되면 이 총재도 성을 낼 법하다. 그런데 김 전대통령이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를 던져도 이 총재는 표정관리를 하며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차기 대통령선거를 치르려면 영남지역에서 김 전대통령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떻게든 그의 협력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김 전대통령이 상대 후보측의 손을 들어주거나, 제3의 '영남권 후보'를 미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총재의 주변의 전략적 판단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깊은(?) 뜻이 있기에 이 총재는 자신을 향해 인간도 아니라는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에게 새해 인사를 갈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이 총재측은 김 전대통령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각도로 공을 들여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는 현실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고 했던가. 아무리 그렇다해도 상도동으로 새해 인사를 가려는 이 총재의 모습은 너무도 어색하기만 하다. 정치인에게도 자존심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대권전략이 중요하다해도, 최소한의 인간적 자존심마저 포기해가며 정치를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선뜻 판단이 서지않는다.
김영삼 정부의 국무총리 시절, 대통령을 향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대쪽'의 기개는 다 어디갔는가. 오늘의 이회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소신과 용기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었던가. 그리고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 전대통령의 탈당까지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 바로 이 총재가 아니었던가.
그때의 이회창, 그리고 지금 인간적 자존심을 접어가며 상도동으로 새해 인사를 가겠다던 이회창 총재의 모습은 쉽게 연결이 되지않는다. 그때는 정치 아마추어여서 그런 것이고, 지금은 노회한 정치인이 되어서 그런 것인가.
나는 이회창 총재가 상도동 새해 인사 일정을 연기가 아니라 취소하기 바란다. 한 나라의 대권을 잡겠다고 나선 정치지도자가 자존심마저 팽개친채 'PK'의 지원을 구걸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자존심을 상하게 되는 것은 단지 이 총재 한 사람이 아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그를 찍었던 1천만표의 자존심도 함께 상하고 말 것임을 이 총재가 생각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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