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느덧 30회를 넘어서고 있는 MBC 주말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엄청난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빛바랜 쌍둥이 사진과 관록 있는 작가, 호화 출연진 등으로 방영 전부터 연예면을 장식하던 드라마다. 특히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남매의 달라진 운명을 통해 대리모 문제와 남아선호사상을 조명해 본다"는 기획의도는, 그렇고 그런 사랑타령이나 늘어놓는 드라마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애초의 기획의도가 쌍둥이의 사진처럼 바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가진 변치 않는 미덕 중의 하나는 바로 '기존의 틀을 벗어난 캐릭터 창조'에 있다.

공수철(안재욱)은 동거녀 행자(박선영)와의 결혼식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직업조차 뚜렷하지 않은 날건달이지만, PC방에서 음란물을 감상하는 남자에게 '도덕성'을 논하며 시비를 걸고, 여경을 위해 더듬더듬 수화를 배운다. 엄마(고두심)는 더 이상 '전원일기'의 큰며느리가 아니다. 시어머니와 아들, 딸 앞에서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심지어 남편 앞에서 익숙하게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특히 언어장애를 가진 맏딸 여경(황수정)의 삶은 '신선함'을 넘어 쇼킹하기까지 하다.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해 집에만 있으려 한다. 종이에 글씨를 써서 의사 표현을 하고(목에 칠판(?)을 걸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수화를 한다.(주변 사람들은 그 어려운 수화를 잘도 알아듣는다.) 물론 유달리 빼어난 미인이 아니면 시집가기도 힘들다'

그런데 여경은 이러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린다.
아버지 회사 홍보부에서 정식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직업 여성이며, 핸드폰 문자 메세지를 이용해 큰 불편 없이 의사소통을 한다. 전화가 걸려오면 핸드폰을 톡톡 건드려 묻는 말에 대답한다. 주변 사람들이 여경을 대하는 태도 역시 일반인을 대할 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우리 나라와 같은 '反 장애인' 사회에서 여경의 이러한 미덕은 동시에 악덕일 수 밖에 없다. '긍정적인 여성 장애인'이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비현실적인 여성 장애인'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95년 정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여성 장애인은 대략 47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장애인'인 동시에 '여자'이기 때문에 일반 여성에 비해서도 그리고 남성 장애인에 비해서도 턱없이 높은 사회적 차별에 직면해 있다.

78.6%의 장애 여성이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을 가지고 있으며 대학교육을 받는 비율은 9.5%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장애인의 취업률은 27.7%인데 이는 남성 장애인의 1/2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20대 장애여성의 60.5%가 미혼이며(일반 여성 50%), 결혼한 장애 여성의 60%는 역시 장애인인 남편을 두고 있다.

자, 이젠 장학수 사장의 큰 딸 여경을 보자.
부잣집 따님으로 태어나 '아가씨' 소리를 들으며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자기 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애인으로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함도 없다. 성격도 여간 온화하지 않다. 주변 사람 누구 하나 말 못한다고 구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처녀 큰 딸을 '치워버리려는' 식구들의 작당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바야흐로 비장애인 남성과의 사랑을 싹틔우는 중이다.

여경에게 있어 말을 못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신체상의 불편함일 뿐이다. 대부분의 여성 장애인에게 '신체의 장애'가 곧 '삶의 장애'라는 현실은 여경의 삶에서만큼은 예외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이 미덕일 수는 없다. 장애 여성이라고 장애 남성만을 만나야 할 이유는 없으며 대학 졸업자나 직업 여성으로 묘사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애인'을 그리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애인'을 그리는 것보다 미덕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인 여성 장애인'과 '비현실적인 여성 장애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여경이라는 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결국 곤두박질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